관찰자의 시선으로 여행하기

-제주 구도심 도보여행

노루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이 기대하는 바를 묻지 않고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분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글을 쓸 수가 없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청소년기를 보낸 80년도부터 90년대 후반까지를 제외하고 이십대의 대부분을 나는 서울에서 탕진했기 때문이다.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지 5년째지만, 아직도 가보지는 못하고 이름만 아는 명소들이 수두룩하니 어디 현지인으로서의 능숙한 가이드가 가능하겠나? 그나마 내가 제안할 수 있는 제주도 여행 테마는 반나절 정도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제주 구도심 도보 여행이다.

제주도에 도착한 여행자들을 쉽게 타자화의 유혹에 빠져든다. 그 시발점은 아마 괭이가 흙바닥에 꽂혀 들어가는 것 같은 생경한 제주어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이 섬에 쉽게 섞여들 수 없겠다는 위화감이 툭툭 발끝에 차이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렇게 이국적이던 정서는 이질적인 감정으로 탈바꿈한다. 알랭 드 보통이 ‘혼돈에서 나오는 이국정서’라고 표현했던, 육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제주도만의 ‘무엇’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기대는 재빨리 불안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 불안에서 해방되기 위한 손쉬운 도구가 타자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는 그럴싸해 보였던 유명 관광지에 당도해보니, 몇 년은 빨지 않은 이불 같은 잿빛 하늘 아래 초라한 기암괴석만이 밉상스레 서있다. 이곳 역시 점령군처럼 진주하고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피해서 인증샷을 후딱 찍은 후에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하지만 소문이 자자한 맛집과 카페에는 이미 줄을 길게 서 있고, 기다림 끝에 맛본 음식이 다시 한 번 기대를 저버리면 여행에 파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남아 있는 미소 가득한 사진들은 더욱 애처롭게 보인다.

제주의 구도심은 지금의 신제주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문화와 상권의 중심지였다. 만약 배를 타고 제주도로 들어온다면, 제주항을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게다가 구도심의 게스트 하우스는 시외권의 숙박시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니 여행 경비를 줄이고자 하는 분들은 눈여겨볼 만하다. 짧게는 반나절이면 둘러볼 수 있는 코스이니 여행의 시작이나 끝의 자투리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좋겠다. 목적지를 딱히 정해두지 말고 구도심의 골목골목을 정처 없이 누벼보자. 제 아무리 깊게 들어갔다 싶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큰길가를 향해서 걸어 나오면 쉽게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제 당신의 대학 전공, 혹은 최근 갖게 된 취미, 그것도 아니면 요즘의 관심사를 스카우터처럼 눈에 착용하고 관찰자로서 구도심을 둘러보길 바란다. 윌리엄 제임스는 ‘내가 무엇을 경험하느냐는 내가 어디에 주목하려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다. 만약 당신이 건축을 전공했다면, 제주도 전통 가옥부터 70~80년대의 개량가옥 그리고 재건축을 위해 뒤집어 엎어놓은 폐허까지, 마치 한국의 건축 역사를 압축해놓은 듯한 풍경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특히 육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타일과 난간의 꾸밈은 더없이 키치적이다.

집주인의 취향과 성격을 대변하는 식물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중력을 거스르듯 두둥실 아기 머리만한 귤이 달린 나무가 보일 텐데, 제주인들은 ‘나쓰미깡’이라 부르는 ‘하귤’이다.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주인 몰래 따 먹었다가는 그 씁쓸한 맛에 크게 후회할 것이다. 계절마다 담장 너머로 꽃망울이 터지고 여간해서는 단정하게 가지를 치지 않으니 밖으로 부끄러움 없이 가지를 드리워 행인들이 보기에 더 아름답다. 아무래도 이 식물들은 일종의 토템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또렷한 잔상으로 남는다. 금귤나무와 백년초 선인장처럼 이곳이 분명 남방의 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나무들에는 과감히 스마트폰의 셔터를 아끼지 말기 바란다.

구도심에는 보살님도 많다. 빨간색, 하얀색 깃발이 달린 대나무 가지를 꽂고 있는 집이 바로 보살집인데 신수, 작명, 택일, 운세, 체 내림, 넋들임 등 못 하는 것이 없다. 그중에서도 넋들임은 제주도 보살님들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다. 제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넋이 나갔다는 진단을 받았을 법한데, 그 증상으로는 악몽을 자주 꾸거나 이불에 지도 그리기가 빈번하고 신체허약 혹은 이유 없는 체중감소 등 실로 다양하다. 보살님의 넋들임을 여러 번 받았던 경험을 토대로 비밀스러운 시술법을 공개하자면, ‘넋들라, 넋들라, 우리 아기 넋들라’를 연발하며 머리와 등을 정성껏 손으로 두드려 주고 정화수를 입에 머금었다 얼굴에 푸푸 뿜거나 생쌀을 집어 던지는 행위가 전부다. 하지만 그렇게 넋을 들이고 나면 신기하게도 밥맛이 좋아지고 잠자리가 편안해졌던 이유는 아직도 설명할 길이 없다. 만약 제주도까지 가슴속 깊은 체증을 짊어지고 온 분이라면 용한 보살님을 수소문해서 찾아보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출출해지면 오래된 빵집에 들어가 손이 가는 대로 빵을 집어 맛보아도 좋겠다. 제주도는 제사상에 롤케익이나 카스테라를 올리던 풍습이 남아있어 오래된 빵집들이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오래되었다는 자랑 말고는 달리 내세울 것 없는 그 뻑뻑한 빵을 베어 물며 잠시 골목의 주인 없는 간이의자에서 다리를 쉬어보자. ‘저게 아직도 남아있었어?’라는 의문을 가질 법한 양념치킨 체인점과 꼬치구이 전문점도 여전히 성업 중이며 아마 그곳의 벽에는 <접속>이나 <쇼생크 탈출>의 포스터가 보란 듯이 걸려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잠시 왜곡되는 웜홀의 입구나 다름없으니 용기를 내어 과감히 들어가 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기울이던 낮술의 취기를 애써 떨쳐내고 싶은 분이라면 근처의 대중목욕탕은 또 어떤가? 찜질방과 대형 사우나에 밀려 육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던데, 아직 제주도에서는 주말이면 동네 대중목욕탕 앞에서 인사를 나누는 이웃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평일 낮, 대중목욕탕의 열탕에 잠겨 흘러간 대중가요 한 소절 흥얼거리는 호기로움도 부려보자.

타고난 미식가가 아니라면 일부러 구도심의 맛집 탐방을 추천하고 싶지도 않다. 제주 음식의 진정한 매력이란 제철의 식재료를 최소한의 조리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로 어느 곳의 어떤 식당을 들어가도 크게 맛있지 않을 것이며, 크게 맛없지도 않을 것을 보장한다. 오히려 구도심의 시장에서 한 끼 해결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되겠다.

하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면 바다 쪽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자. 아무리 구도심 중심부에 있다 손 치더라도 가장 가까운 해안으로 20여 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희미한 녹색의 바닷물과 시멘트 빛깔의 하늘이 만나는 지평선 끝을 물들이는 노을 너머 납으로 만든 십자가처럼 분주히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순간,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떠나온 평범한 일상에도 이와 비슷한 풍경들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단지 관찰자로서의 애정 어린 시선이 부족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 당신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제주를 떠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