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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의 경제, 관찰의 윤리
통권 : 52 / 년월 : 2015년 7,8월 / 조회수 : 2981

관찰의 경제, 관찰의 윤리

 

남웅

 

'관찰'은 단어 그대로 눈과 결부된 행위이다. 관찰하는 눈, '관점'(관찰하는) 주체를 상정한다. 세계를 읽어내는 과정 속에서 불완전한 자아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삼라만상을 이해하고 생존의 기술을 축적하며 세계 안에 질서를 구획하고 안정적인 주체의 위치를 점유한다. 그런 점에서 관찰행위는 대상 뿐 아니라 주체의 요구, 욕망의 테두리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관찰행위에는 대상과 주체 외에도 관찰하는 행위를 인지하는 3의 눈을 필요로 한다. 사르트르의 열쇠구멍은 시선을 응시하는 또 다른 눈을 명명한다. 타자를 관찰하는 나의 모습은 누군가의 응시 대상이 된다. 그는 나를 보는 제 3의 인물이거나 타자의 시선처럼 스스로 거리를 두고 응시하는 나 자신일 수 있다. 메타 주체의 시야에서 나는 보는 주체이자 보이는 대상이다. 여기서 일별되는 관찰의 유형들 또한 시선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자리매겨진다. 이때의 시선은 권력으로 다시 읽어도 무방하다.

 

사회질서유지를 명목으로 수행되는 수직적 관찰은 위험관리와 안전을 목적으로 위로부터의 감시와 도청을 용인한다. 이름과 관상학의 수준에서 이뤄져온 관찰은 매체의 다변화와 시스템의 진화를 통해 실체와 인식의 간극을 좁히고 집요하게 대상을 추적해왔다. 고문을 동반한 사상검증은 경찰력을 동반한 디지털 검색의 수고로움이 대체한다. 한편으론 지문과 동공 등 신체 표식을 대상으로 인지되고 관리되었던 주체가 인공위성과 생체리듬 측정 프로그램이 탑재된 초국가기업의 스마트 제품들을 통해 초단위, 분자단위의 편리를 누린다. 가령 스마트환경에 접근만 가능하다면 간단한 기기를 탑재함으로써 이동경로와 맥박수, 혈압 등 준전문적 몸관리부터 동선을 파악하여 소비패턴에 맞는 카탈로그나 추천정보와 상품을 제공받는 등 생체적 삶을 향유할 수 있다. 이는 수치화된 나의 신체가 문명의 편리를 향유하며 부지불식간에 대타자 권력에 해체되며 포섭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시선의 권력이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보이는 대상으로 취급되는 대중들 개개인은 시선에 포착되는 대상으로서 위치를 주체적으로 전유한다. 셀카를 찍어 SNS에 올리며 관심을 유도하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능에 들어온 CCTV가 연예인의 육아관찰기로, 예능화된 전문직업인의 관찰카메라로 기능확대되는 현상은 관찰의 의미효과를 확장한다.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권력역학이 전유되고 역전됨에 따라 관찰은 예능화된다. 관찰에 담긴 정치적 함의는 무게를 덜어내며 가벼운 데이터단위로 확산되어 구경거리의 삶, 이른바 쇼윈도 라이프를 과시한다.

 

관찰대상이 대상의 위상으로 남겨지지만도 않는다. 감시와 감찰의 대상이었던 피관찰자들은 자신을 겨누는 시선의 구조를 역추적하기도 한다. 이들은 보급된 최신 광학기구와 정보검색매체들을 동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틈새에 서사를 넣어 파놉티콘의 실체를 해체한다. 그 결과는 모니터링과 옴부즈만, 심지어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집중도와 관찰력의 차이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는 권력의 무능력한 위험관리와 감시의 일상화에 대한 대중의 불신에서 비롯된 각자도생의 기술로서 관찰의 또 다른 면모일 것이다.

 

관찰하는 눈은 명징하지만 내가 인지하는 현재의 세계를 구축하고 선긋는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체제이자 명료하게 언표화될 수 있는 세계, 과거와 단절된 오늘이다. 가치관과 정체성, 도덕으로 부르고 그 외의 것들을 없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현재 기억되는 과거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상의 다른 이름이다. 관점 바깥에 여과되지 않은 잔여물은 타자’, ‘소수자로 자리매김되며 관용의 대상이 되거나 변태, 범죄자, 난민, 거지, 병신으로 취급되고 인식조차 되지 않아 취급조차 불가능해진다.

 

관찰을 논하는 이 글의 관점은 시선의 위상에 따라 일별된 관찰유형들로부터 시야에 비켜난 잔여, 관점의 의미망에 용해되지 못한 침전물로 자리이동한다. 이는 상징계에 여과되지 않고 여과될 수 없으며 여과되지 못하는 존재, 또는 여과되지 않는 채로 상징화되어버린 존재, 존재로 호명될 수 없는 존재, 동공에 맺히지 못한 분비물, 불순물, 오물, 장애물, 관찰되지 못한 것들의 증상이라 부르는 것들의 존재이다.

 

이들에 대한 시선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것이나 태도의 상이함은 관찰의 폭력으로 수렴된다. ()의도적으로 망각해 없는존재 취급하는 것이 그 하나라면, 철저히 망각하기 위해 과잉된 관찰을 수행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가령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백에 지배담론은 피해자를 겨냥하여 당신의 처신잘못으로 낙인찍거나 이들을 입막음함으로써 2차 가해를 재생산한다.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세력들은 성소수자를 변태성욕자로 명명하며 자신의 변태성을 십분 발휘한다. 이른바 '외설적 관찰'은 관찰자의 도덕적 명분이나 사회적 입지를 명목으로 타인을 상징적으로 삭제하고 오물 취급하는데 과잉된 능동성을 보인다.

 

물론 (여느 시선의 경제가 그러하듯) 언어의 상징적 체제에 여과되지 못한 존재가 일방적으로 관찰대상으로만 남겨지지는 않는다. 관찰과 피관찰, 주체와 타자의 위상이 단순히 역전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집단적인 목소리는 착취자의 언어를 빌리거나 전유함으로써 피관찰자, 관찰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거스르는 울림을 낼 수 있다. 울림은 주체와 타자를 선긋는 권력 자체에 물음을 던진다.

 

사르트르가 열쇠구멍의 시선을 언급한 수십년 후, 라캉 또한 응시를 역설했다. 나를 응시하는 사물의 시선, 타자의 응시로부터 라캉은 응시를 인식하는 주체의 시선으로 복귀했다. 나의 관점과 거리를 두고 나의 유한성, 나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는 성찰은 결론적으로 관찰의 윤리로 나아간다. 응시를 인식하는 주체는 볼 수 없는 것, 보지 않았던 것을 보려는 주체, 환대의 주체이다. 보지 못하는 것, 타자의 존재로부터 도래할 주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주체이기도 하다. 타인의 목소리, 이웃의 얼굴, 내면의 울림을 관찰할 수 있는 시선은 시선의 연대를 통해 집단적 울림을 낸다.

 




#저자 약력
남웅(南雄)
1984년 서울 출생. 제4회 플랫폼 미술비평상 당선, 『감염병과 인문학』(공저)
0123tem@hanmail.net
글쓴이 : 남웅
작성일 : 201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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