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연극은 신념을 갖고 도도하게 복고라는 시대의 유행으로부터 비껴가기를 고수해왔지만 차고 넘쳐나는 타 미디어의 복고 열풍과 그에 응답하는 대중들의 상당한 호응을 목도해야만 했고, 이와 같은 복고의 압박에 스스로 당대의 문화물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그리고 마침내 복고를 받아들인 작품 ‘한 편’이 대학로에 등장했다. 1997년 전국체전을 배경으로 고등학생들의 방황과 사랑을 그린 <유도소년>(박경찬·이재준 작, 이재준 연출)이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재 대중문화물에서 유효한 복고로 통용되고 있는 1990년대의 문화를 수용한다. 공일오비, 자전거 탄 풍경, HOT, 유피, 지누션 등 1990년대의 음악과 삐삐, 워크맨 등 당시 신세대들의 소품, 그리고 지금 보면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그때의 패션까지 무대는 1990년대 시청각 문화로 채워진다.

어찌 보면 <유도소년>의 출발은 불안하다. 복고의 늦은 수용, 그리고 기존의 미디어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것과 비교해 차별적 지점이 잘 발견되지 않기에, 대중을 맞이하는 그 시작부터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 대한 우려는 연극 내부의 시선에서도 존재한다. 유행 키워드인 복고가 전경화된, 오락성이 강조됐을 거란 짙은 혐의, 그런 까닭에 작품은 상업극으로 분류될, 비평의 영역으로부터 밀려날 공산이 크다. 후자의 우려와는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하나, 작년에 이은 재공연과 나름 순조로운 흥행은 대중과의 접선에서 오는 불안을 해소했다고 볼 수 있다. 이즈음 되면, <유도소년>이 선택한 복고가 대중을 설득시켰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을 이끄는 힘은 복고가 아니다.

<유도소년>의 복고는 서사를 이끌고, 작품의 의미층을 두텁게 하기보다는 소소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간혹 이 즐거움을 겨냥한 계산적 장면들이 복고의 압박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작품에서 복고를 거두어낸다고 해도 작품의 서사는 무너지지 않는다. 작품을 지탱하고 무대에 집중케 하는 역할은 복고가 아닌 스포츠와 배우들의 연기가 담당한다. 스포츠는 과정과 결과가 분명하기에, 지난한 싸움과 그 성취를 기대케 한다. 물론 승리라는 빤한 결말을 내놓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영리하게도 <유도소년>는 결과를 전복·지연시켜, 향후 진행될 상황에 대한 기대를 유지시킨다. 즉 관극의 몰입도를 높인 셈이다. 또한 스포츠가 갖는 역동성은 다채로운 연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데에도 용이하다. 그리고 여기에 나름대로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그리고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홍우진, 박훈, 박해수 등 각기 다른 색깔의 배우들을 멀티캐스팅함으로써 재관람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며, 더불어 서사의 견고함과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인해 이 작품은 비평의 영역으로 유리된 상업극과의 선긋기에 성공한다.

<유도소년>은 앞서 언급한 다른 극예술 장르인 드라마와 영화처럼 복고가 작품과 긴밀히 소통하기보다는 복고로 작품을 포장한다. 그 포장술이 제법 성공적이다. 이 작품이 보여준 연극과 복고의 만남은 전략적이다. 이 전략이 성공했기에 다음 주자는 아류가 되기 쉽다. 이에 전략이 아닌 긴밀한 만남을 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 연극은 드라마처럼 긴 호흡의 장르가 아니기에, 여전히 대중문화물에 대한 자기방어가 강하기에 그 만남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유도소년> 외에 복고를 활용한 작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정말 연극은 복고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는 것일까.

다시

복고의 영역 안에는 문화뿐 아니라 사상, 제도, 풍습, 정치 등도 존재한다. <안전가족>(란디모스 작, 김현경 역, 김수정 각색·연출)은 그리스 장편 독립영화 <송곳니>(2009)를 연극화한 작품이다. 세 명의 자식들이 카세트 앞에 모여 있다. 단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하다. ‘씨발’은 기분이 좋을 때, ‘오토바이’는 성숙한 태도를 갖고 기쁨, 찬성, 환영의 감정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착한 일을 한 아들에게 제공되는 선물은 가족들의 모습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감상하는 것이다. 이를 관람하는 가족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안전가족>의 아이들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살아간다. 이들에게 법은 아버지의 말씀이다. 아이들의 모든 행동과 사고는 아버지의 의해 지배되고 조종된다. 부모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을. 자식들의 불온한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부모는 자식들에게 적당한 당근을 제공한다. 사춘기의 차오르는 성을 제어하기 위해 아버지는 돈으로 여자를 사고, 익스트림 스포츠란 이름의 기계적인, 아주 간단한 동작의 성관계를 아들에게 제공한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여성이 자식들에게 외부를 공급하자, 이 스포츠를 위한 아들의 상대자는 누나로, 동생으로 교체된다.

연극 <안전가족>은 이들의 부모가 자식들에게 왜 이러한 폭력을 가하는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극단적 상황을 행복한 가정의 모습으로 디자인하는 이에게 그 답을 듣기란 쉽지 않으며, 그 폭력의 강도와 형태가 상식을 넘어서기에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이러한 극단적 통제, 억압, 그리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쏟아내는 모습이 ‘그때’를 떠오르게 한다. 연극은 동시대 대중/관객에게 지금/여기에서 소통 가능할 수 있는 것을 무대에 제출하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국가 이데올로기에 흡수되어야 하는, 그 밖의 영역은 결코 허용치 않았던, 그것은 오직 폭력이었던 그때를 환기시키는 연극이 지금/여기의 무대에 올랐다.

복고는 과거와 현재에 의해 성립된다. <유도소년>이 지난 문화를 향유하는 차원에서 과거를 현재로 호출했다면, <안전가족>에서의 복고는 무엇인가. 문화의 향유는 아닌 듯하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독재, 폭력, 억압 등의 공포를 떠오르게 한다는 점과 연극은 동시대의 가치들과 상대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