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동의 비밀스런 통치자들

성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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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강변 인근의 작은 목공소에서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신 적이 있다. 그곳 주인은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연인과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탄 친구의 옛 연인을 만났던 것이다. 우리는 반가워했다. 넷이서도 술을 마시곤 했기 때문이다. 장마철이었는데 또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분은 인근에 아는 사람의 가게가 있다면서 함께 가서 비를 피하자고 했다. 낮인데도 목공소 내부는 어둑했다. 그렇게 반기는 내색도 꺼려하는 내색도 아니었던 주인과 둘러앉아 심심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어쩐지 그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질은 나빴다. 탁하고 울림이 심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형편없는 소리가 노래를 바깥의 비와 어우러지게 했고 그것이 마음의 피로마저 풀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을 찾느라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건 흔히 볼 수 있는 컴퓨터용 스피커였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초저가라는 점에서만 특별한 제품이었다. ‘일하면서 듣기 딱 좋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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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직장인 음악마니아 사이에서 ‘노동요’라는 단어는 일종의 관용어가 된 것 같다. 비록 노예처럼 일하고 있지만 좋은 음악이라도 들어 영혼을 구제하겠다는 일종의 건강관리다. 에스앤에스에서 이런 사연이 눈에 띄면 링크된 동영상을 눌러보는 편이다. 혹시 내게 도움이 될지 몰라서이기도 한데 그보다는, 누군가를 ‘버티게’ 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 사람의 내면을 짐작해보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담배는 건강에 나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이유라고 제시된 것들 중에서 내가 가장 유력하다고 믿는 쪽은, 흡연이 일상의 시간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설명이다. (『인간의 마음』)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을 자유의지대로 살지 못하며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비)가시적인 과업에 쫓기며 사는 것이 보통이다. 하루하루 급급해하며 살아간다는 자기성찰도 해가 거듭되면 과부하가 걸려 우울이 된다. 내 인생을 스스로 쉬고 잇고 흘러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픈 심리. 그것을 뒤집어 마음이 주장하고 있는 결핍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터다. 이런 의미에서도 음악만큼 인체에 무해한데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대엔 더더욱) 시간, 돈 별로 안 드는 취미가 없다. 슬프게도, 씁쓸하게도 정말 그렇지 않은가.

하여간 음악은, 분명 담배보다도, 우리의 일과에 폭넓게 리듬을 부여해준다. 운전이나 다림질, 컴퓨터 작업처럼 말없이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특히 그렇다. 끝도 시작도 없이 중간에서 정체되어 시지프스처럼 기를 쓰고 바위를 받쳐 올리는 것만 같은 고단함. 공허한 소음들. 하지만 거기에 좋아하는 음악을 넣으면 견딜 만하다. 어떤 땐 현실의 색채마저 바뀐다. 자신을 건사하기 위해 직장과 집에서 발휘하는 갖가지 인내나 조바심에 여행자의 넓이가 스미는 것이다. 밋밋한 가슴에 카타르시스가 타오를 때도 있다. 그래봤자 대부분은 충전된 그 힘으로 주어진 일을 처리할 뿐이지만.

당연하게도, 내게도 노동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쉽게 추천하진 않았다. 단지 ‘듣기 좋은 음악’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서다. 그 음악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필요한 집중력과 내적 질서를 갖고 있어서다. 가령 올리 아흐벤라티(Olli Ahvenlahti)의 <The Poet>(1976)이 그렇다. 재즈의 본국이라고 할 순 없을 핀란드 레이블에서 나온 앨범으로 조금은 이색적인데다 완성도 면에서도 훌륭한 재즈 음반이다. 보컬이 없는 이런 전문 연주자들의 작품집은 개인이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할 수 있게 한다. 생각을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 일이라면 특히, 언어의 직접적인 자극이 있는 음악보단 어느 정도 추상적인 음악이 든든한 동료가 되는 듯하다. 관념들을 현실의 파동 속에 새겨 넣는 날카롭고 유연한 리듬들이 생각의 발걸음에 탄력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하긴 취향은 제각각이더라도, 노동하는 인간에게 음악이 주는 영향은 공통적이다. 멜로디를 통해 처음, 중간, 결말에 이를 때마다 거듭되어 체화되는 박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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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 개봉한 <러브 앤 머시>에는, 천재 뮤지션이 나온다기보다 한 예술가가 심리 장애를 겪으면서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일련의 과정들이 나온다. 그저 때마다 기분 좋게 즐기면 족할 히트곡 <Surfin’ U.S.A>가 아닌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의 불행과 사랑, 실패와 발견이 그 주제다. 즉 그것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삶이 내포하는 음악성. 나는 특히 (1966)의 녹음과정을 묘사한 씬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상업적인 대성공의 영광을 누리는 데 시간을 쓰길 거부하고 진짜 해보고픈 작업을 위해 헌신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예술이라는 노동과 그 현장의 열기를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유행상품과 그것의 상징으로 분한 연예인에만 주목하지만, 그는 녹음실에서 ‘이런 연주자를 아무도 모른다니’하고 놀랄 수밖에 없는 전문 음악인들을 만난다. 그들은 음악을 통해 표현하고 조율하며 벽에 부딪혔다가도 생각지도 못한 경로를 찾아간다. 의미심장한 것은, 주인공에 대한 인물들의 접근과 시선이다. 그를 두고 함께 앨범 작업을 한 연주자들은 ‘천재적’이라고 하고, 쇼비지니스의 성취에만 관심을 둔 다른 멤버는 ‘이기적’이라고 한다. 게다가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환자로 보는 (그 자신이 오히려 망상증 환자인) 임상심리학자는 그를 실험 대상으로 소유하고 망쳐놓는다. 하지만 관객은 주인공에게서 광기와 재능이, 해리와 몰입이, 망상과 환상이 서로 얼마나 가깝고 변환되기 쉬운 관계인가를 지켜본다. 또한 그의 예술은 젊음의 해변에 부서지는 햇살이라기보다 페이스트리 같은 음악에 비친 부드러운 빛이라는 점도. 일상과 내면의 청각적인 요소들이 그 겹을 이룬다. 도덕과 산업은 ‘선이냐 악이냐’, ‘우위냐 도태냐’처럼 주로 이분법적이지만, 예술이라는 노동은 고도로 발달될수록 통치의 논리가 멀찍이 벌여둔 것들의 사이를 불러 모은다. 없는 셈 치고 살던 것들을 자아내는 주문인 셈이다. 반대로 함께 있으면 위험할지 모르는 결합도 넌지시 암시한다. 가령 삶의 가치와 통계 수치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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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엔 고대하고 있던 파라솔의 <언젠가 그날이 오면>을 들었다. 작년 7월 EP앨범을 낸 뒤로 일 년 만에 대망의 첫 정규앨범을 발매한 것인데, 이로써 멋진 인디밴드가 한 팀 또 탄생한 셈이라는 생각에 기뻤다. 이들의 음악은 일이 끝난 한 밤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둘러 앉아 맥주라도 기울이며 감상하면 좋을 것이다. 이 음악은 가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므로 말이 잦아든 새벽이면 더 와 닿을 것이다. 싸이키델릭한 70년대 풍 밴드 사운드를 깎아 만든 그들의 이야기가 묘한 상념과 감정에 잠기게 한다. 현실과 몽환이 한 곳에서 넘치고 흐른다. 그러니까 음악이 멋진 노동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점이다. 해당 씬에서 이미 어느 정도 뼈가 굵은 이들이 새롭게 뭉치면 때때로 이렇게 닫힌 차원의 문을 여는 작품이 나온다는 것. 지난한 가운데 환희가 일어나는 이런 순간들이, 더욱 더 우리의 일상을 지배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