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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의 응시로 구현한 시대, 시대를 초월한 예술
통권 : 53 / 년월 : 2015년 9,10월 / 조회수 : 4139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7월 22일~11월 1일)

화가의 응시로 구현한 시대, 시대를 초월한 예술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722~111)

 

정호경

 

 

이쾌대(李快大, 1916-1965?)는 월북화가로서 그 이름조차 거론될 수 없었던 금기의 작가, 얼굴 없는 존재였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념한 월북화가 해금 조치 이후, 우리미술사에서 복권된 지 이제 28년이 되었다. 그 사이 작가에 대한 몇 번의 전시가 있었고, 유족의 노력으로 지금껏 지켜왔던 유화 및 드로잉, 각종 기록물이 수록된 단행본 등이 발간되었으며 다수의 논문이 그를 조망해왔다.

 

이렇게 틈틈이 소개되었던 작가의 화업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회고전으로 덕수궁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복권된 근대의 화가, 이쾌대가 아닌, 시대를 대변하는 거장으로서 그를 명명하고 지난 시대가 통과해왔던 억압과 질곡의 현실, 그 현실 속에서 줄곧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던, 강인하지만 섬세했던 작가의 시선을 복원하고 있다.

 

이쾌대가 구현한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접한 듯, 탄탄한 서사성과 압축적인 형식미, 현실을 담아낸 생생한 리얼리티에 놀라고 이러한 역사가 이어져온 현재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아울러 화가가 이룩한 회화적 발전과 통렬한 주제의식을 가늠케 하는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물론,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아내를 줄기차게 그렸던 자상한 남편, 자식을 걱정하는 가장의 모습을, 또 누군가는 혼탁한 시대와 타협하는 접점을, 혹은 화면 밖 관람객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그의 예술을 볼 수도 있겠다.

 

그 어떤 경우가 되었건 이번 전시에서 가장 상징적인 시선을 담은 2장의 이미지는 흔적과 재현의 방식으로 우리 앞에 이쾌대라는 인물을 소환하고 있다.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자연인 이쾌대의 모습은 존재했던 인물의 흔적으로서 우리 앞에 등장한다. 한편, 붓을 들고 세상을 응시하고 있는 이쾌대는 시대를 대변하는 예술가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보다 더 그의 삶과 예술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이 두 이미지는 그가 살아온 궤적을 담은 얼굴과 그가 예술로 발언하고 싶어 했던 세계에 대한 응시 그 자체를 대변한다.

 

도판1. 이쾌대 사진

도판2.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72×60cm, 개인소장

 

 

인물화를 통한 실존의 구현

 

이쾌대가 미술을 공부하게 된 것은 휘문고보(徽文高普) 시절,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가르침을 주었던 화가 장발(張勃, 1901-2001)에 의해서다. 또한 화가 못지않은 실력과 사회주의운동가로 명성을 날렸던 형 이여성(李如星, 1901-미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장발은 1920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 후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 빼어난 재능의 이쾌대에게 좋은 스승이었다. 또한 형 이여성도 1923년에 대구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기도 하였고 1933년부터 3년간 협전에 출품할 정도로 한국화에 재능이 많았으며, 역사화에도 출중하여 이쾌대의 훌륭한 역할 모델이었다.

 

특히, 이여성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조선 후기의 채색 풍속화를 한국미술의 중심축으로 보는 등 우리나라 미술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지닌 당대 최고의 실천적 지성이었고 이러한 형의 역사의식과 예술적 관점은 한참 나이 어린 이쾌대에게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학창시절 뛰어난 데생력을 보였던 이쾌대는 재학 중에 이미 당대 최고의 영예제도(榮譽制度)였던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1932)<정물>이란 작품으로 입선하였다. 이후 일본 제국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로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학습기를 거치게 되었고 점차 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근대기 새로운 예술적 경향, 특히 유화로 대변되는 신미술의 대표적인 장르는 누드화였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유학생활을 시작한 이쾌대는 인물화에 대한 관심을 누드습작 등을 통해 발전시키게 된다. 특히 인체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포즈의 누드화에 대한 수련은 전통적인 조선 화단에서는 도입되기 힘들었던 영역이었기에, 이 시기 이쾌대가 서구적 인체표현을 근간으로 한 인물화 탐구에 집중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가 즐겨 그렸던 인물은 대부분 여성으로, 특히 부인 유갑봉의 그림을 많이 그렸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문 모델을 구하기 힘든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작가의 삶과 예술에서 제일 소중하고 찬란했던 시절의 여인, 첫사랑이자, 아내인 유갑봉은 친밀감을 바탕으로 가장 깊숙한 내면의 모습까지 표현하려는 화가의 인물화 탐구에서 최고의 대상이었다. 동일한 대상에 다양한 회화적 접근을 시도하고 구성 및 색채 효과를 탐색하는 과정이 부인을 그린 무수한 드로잉과 초상화로써 추적될 수 있으며 이러한 풍부한 시각 자료가 남아있는 예는 우리 근대미술에서 흔치 않은 사례이다.

 

이쾌대가 남긴 아내에 대한 연서(戀書), 화가의 시선이 포착한 아내의 이미지는 두 사람의 결속이 얼마나 견고했는지 증언하고, 이러한 결속은 남편의 월북 이후, 감시와 갖은 고초 속에서도 남편의 분신 같은 작품을 지켜, 오늘의 역사로 탄생시켰던 화가의 아내가 우리 미술계에 남긴 유산이 되었다.

 

도판3. <드로잉 14-11>, 종이에 연필, 21.8×16.7cm, 개인소장

도판4. <카드놀이 하는 부부>,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91.2×73cm

 

아내와 함께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잠시 잊고 온전히 예술적 고민과 발전에 집중했던 제국미술학교 시절은 두 사람이 보냈던 가장 찬란한 시간이었고 대상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점차 인물의 심리적 내면까지 포착하려는 회화적 실천이 시도된 중요한 시기였다. 특히 화면 속 인물의 응시를 통해 회화적 공간과 화면 밖 현실공간의 매개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재현된 인물의 심리적 표현을 위한 색채 실험 등이 다각적으로 시도되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특정 대상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 미묘한 뉘앙스와 특별한 의미가 깃든 주체성을 지닌 인물, 익명의 회화적 대상이 아니라, 화가 주변의 삶과 현실을 특징적으로 반영하는 성격화된 인물로 표현되었다.

 

이쾌대가 유학했던 제국미술학교는 1929년에 창설되어 도쿄미술학교의 보수적인 관학풍 분위기와는 달리, 좀 더 자유로운 학풍과 다양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다수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수학했던 곳이다. 제국미술학교 교수 가운데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도 상당수 있어, 당대 서구 화단의 최신 경향과 전위적 흐름이 발 빠르게 소개될 수 있었다.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에서 화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전시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 재학생들로 구성된 하랏파(はらっぱ) 전람회에 참가하여 <궁녀의 휴식>을 출품하였고, 하랏파가 4회부터는 로쿠호샤(綠包社)로 이름이 바뀐 가운데 1937년 일본 긴자 기노쿠니야 갤러리에서 개최된 제2회 로쿠호샤 전람회에 <무희의 휴식>을 출품한다. 또한 졸업 직후에는 일본 최대의 재야그룹인 니카카이(二科會)에도 참여하였다. 이쾌대는 1938년 제25회 니카카이 전람회에 <운명>, 1936년 제26회 전람회에 <저녁소풍>, 1940년 제27회 전람회에 <그네>를 출품해, 3년 연속 입선하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도판5. <무희의 휴식>, 1937, 캔버스에 유채, 116.7×91cm, 개인소장

도판6. <운명>, 1938, 캔버스에 유채, 156×128cm, 개인소장

도판7. <상황>, 1938, 캔버스에 유채, 156×128cm, 개인소장

 

<무희의 휴식>은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완성한 작품으로 그간의 성과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초기작품이다. 전통복장을 한 여인이 어두운 배경 속에 살짝 위를 쳐다보며 화면 밖을 응시한 채 앉아있다. 화려한 한복의 색감은 짙은 배경과 대비되어 인물에 집중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좌측을 향해 90도 각도로 틀어 앉은 몸은 45도 각도로 비켜있는 의자와 중첩되었고, 이렇듯 중심인물의 포즈를 통해 주변 환경과 교차 배치하는 화면구성 방식이 특별한 작품이다.

 

<운명>은 니카카이 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으로 점차 인물화에 상징적이고 다중적인 해석이 도입된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죽음을 맞이한 듯 후경에 수평축으로 누워있는 남자와 전경에는 수직축으로 4명의 여인들이 침울한 모습으로 중첩되어 앉아있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특정 사건은 생략된 채, 오직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만이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은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하고, 화면 속 인물들은 일상의 경험치를 벗어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이쾌대는 극도로 절제된 색채와 압축적 공간구성을 통해 뒤틀린 일상, 일상에 침투된 비극적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화면 속 여인들은 화면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식의, 결연한 의지나 주체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이 모든 상황을 견뎌내고 고뇌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과도 다름 아니다.

 

<상황><무희의 휴식>에서 화면 밖을 응시하던 동일 인물을 중심으로 입을 두 손으로 가린 헐벗은 여인, 머리를 풀은 한복 입은 여인이 우측에, 미간을 찌푸린 양복 입은 남자와 두 손에 선물을 들고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조바위 쓴 노파가 좌측에 배치되어 있다. 좁은 실내 공간에 5명의 인물이 원형구도를 이루며 서로의 연관성을 보여주듯 중첩되어 위치한다. 이들은 특정 상황에 대해 각자의 특수성을 드러내며 다르게 반응하는 한편, 인물간 인과관계를 내포하는 등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해석과 인물간의 의미망이 상징화되었다. 이 작품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와 상징화 방식을 사용한 전무후무한 작품으로 좀 더 구체적인 작품해석은 풍부한 도상적 의미화 과정을 거쳐야 가능할 법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을 꼼꼼히 분석해 본다면, 이쾌대가 화가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과 성과를 추산할 수 있다. 그림은 물감이 발린 단순한 화면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이 반영된 회화적 공간으로 구성되고, 인물의 배치, 복잡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색채효과, 상징적 서사구조 등이 가미되어 다층의 의미망을 형성한 독특한 작가만의 스타일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전통기법을 통한 유화의 토착화

 

제국미술학교 졸업과 더불어, 이쾌대는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다양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전문화가로서 경력을 쌓는 한편, 재동경미술협회, 조선신미술가협회 등을 결성해 젊은 미술가 중심의 단체활동을 이어나갔다. 특히,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와 거리를 둔 채,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를 바탕으로 서양화의 모던함과 탄탄한 구성력의 작품을 시도하였다. 그는 이른바 동양주의로 대변되는 향토성 짙은 소재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시기 이쾌대의 화업에서 중요한 변화를 시도한 것이 바로 신미술가협회 활동이다. 신미술가협회는 일본의 미술학교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단체로 19413월 일본 도쿄에서 창립전을 개최하고 같은 해 5월 서울에서도 제1회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순수미술단체를 표방한 이 협회는 일제 말 암울한 현실 속에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한 현실도피적 경향으로 비판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조선미전 등의 관제 미술의 대척점에서 한국적인 것을 조형적으로 탐구한 중요한 단체이기도 하다.

 

이쾌대는 신미술가협회전1941년에 <부녀도>, 1943<그네>, <부인도>, <> 등을 출품했다. 이쾌대의 전통 한복을 입은 여인들은 세필의 선으로 윤곽선이 처리되었고 물감 역시 얇게 발려있다. 이러한 전통 회화요소의 도입과 동양적 선묘 중심의 얇은 물감층의 화면을 통해 한국적 정취가 강조되어 표현되었고, 특히 <부인도>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듯한 말의 모티브가 인물의 뒷배경에 사용되는 등 민족주의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도판8. <부녀도>, 1941, 캔버스에 유채, 73×60.7cm, 개인소장

도판9. <부인도>, 1943, 캔버스에 유채, 70×60cm, 개인소장

도판10. <이여성>,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90.8×72.8cm, 개인소장

 

유화의 두꺼운 질감에 대한 관심보다 세필의 선묘와 얕은 색감 층을 구사하여 우리의 전통화의 느낌을 접목시키고 실제로 한국화에서 사용하는 가는 붓을 사용했던 점은 이쾌대가 구사한 1940년대 유화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화면 속 장식 모티브, 소품 등에서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으며 이는 전통미술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연구해 온 형 이여성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쾌대는 전통미술의 조형적 요소와 기법을 서구의 매체인 유화에 적용시킴으로써 민족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구현시킬 새로운 미술언어를 탐구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시대의 리얼리티, 민족의 아이덴티티

 

가장 비극적인 시대에 한 줄기 빛으로 찾아온 해방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감각으로 다가왔고 당대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티를 창조하려는 욕구는 실로 대단했다. 해방공간이라는 새 시대의 현실을 표현하고자 당시 예술계는 다각적인 방향 모색이 있었고 이는 정치적 노선, 예술적 비전 등의 견해차로 무수히 많은 예술가 협회와 동맹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 혼탁한 상황은 비단 예술계의 상황만이 아니라, 해방의 자유는 잠시뿐, 새 시대의 비전과 방향설정의 지체(遲滯)가 초래된 당대의 현실이기도 했다.

 

해방 후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민족의 염원과 희망을 담아내는 시대를 대변하는 그림이 절실했음에도 해방을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에는 이러한 역사화를 보여줄 여력이 당시 화단에는 없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억압과 굴종의 역사로부터 해방된 그날, 이 땅의 그 누구라도 서로 끌어안고 민족과 역사,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공유할 역사화는 쉽게 제작될 수 있었던 성격은 아니었다.

 

이제껏 제작한 수많은 드로잉과 인물화는 바로 이 새 시대의 미감을 표현하기 위한 전사(前史)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 이쾌대는 장대한 역사화 연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물화를 통해 발전시켰던 다양한 조형요소를 통합하고 거대한 주제로서 민족, 민중의 추상적 의미를 군상의 형식으로 구현시킨다. 그의 군상 시리즈는 이제껏 그 어떤 작가가 이룩하지 못했던 시대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완성해 낸 4부작 연작이다.

 

도판11. <군상-해방고지>, 1948, 캔버스에 유채, 181×222.5cm, 개인소장

도판12-13. <군상-해방고지> 세부

 

해방 전부터 준비해왔던 것으로 알려진 <군상-해방고지>는 장대한 구성 안에 다양한 인물의 모습이 역동적이고 격정적으로 구현되어 있어 해방공간을 담은 최고의 근대미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왼쪽에서 날아오듯 달려오는 두 여인은 해방의 소식을 전하고 이들을 맞이하는 일군의 군상이 화면의 우측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화면 속 인물들은 근육질의 강건한 신체, 특정 인물이 아니라 새 시대를 대변하는 이상적인 인물로 표현됨으로써 인물에 대한 신고전주의적인 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또한 해방의 소식을 맞이하는 우측 중앙 5인의 인물 앞쪽에 위치한 핍박받은 희생자의 절규하는 모습과 겁에 질린 인물들, 중경에 위치한 헐벗은 어머니를 향해 기어가는 아기의 모습은 격렬한 현실에 회화적 상상력으로 반응했던 서구의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사회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토대로 혼란과 격정의 시대를 재현하려는 작가의 의지와 고군분투의 산물이다.

 

도판14. <군상>, c.1948, 캔버스에 유채, 177×216cm, 개인소장

도판15. <군상> 세부

 

<군상>은 거대한 인물의 파노라마 속에서 시대와 민족의 서사구조를 노정한 최고의 역작임에 틀림없다. 다양한 포즈와 구성 인물의 생생한 표정, 역동적 공간을 휴먼 스케일로 구현한 서사시와도 같은 작품이다. 혼탁한 시대를 관통해 회화적 리얼리티가 성취되는 순간을 군상 연작의 최종 종착지인 이 작품에서 맞닥트릴 수 있으며 역사화 형식으로 담아낸 장대한 스케일의 시대적 초상인 것이다.

 

군상은 복잡한 인물군이 주제의식을 노정한 일종의 전형으로 제시되면서 단일한 인물들의 단순 집합체가 아닌, 시대의식과 역사성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대변한다. 특히, 해방공간에서 민족의 미래와 정체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당대 현실에 대한 작가적 반응이자,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회화적 결론과도 같은 작품인 것이다.

 

 

시대와 체제를 관통한 화가의 예술혼

 

한국전쟁 중에 이쾌대는 병환의 노모와 해산이 임박한 아내 곁을 지키며 서울에 있었고 자세한 경위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0년 서울 수복 직전에 집을 나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부산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친 후, 포로교환 때 월북을 선택하였다. 이 시기 그의 행적과 월북에 대한 경위 등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다. 다만, 어렵게 인편을 통해 전달된 수용소에서 보낸 화가의 편지가 전해졌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한푼 없는 당신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쌀스럽기 한량 없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오. 나는 이곳 포로수용소에서 나를 두둔해주는 친지들의 덕택으로 잘 잇씁니다...미국인 수용소 소장도 미술을 이해...분이기 때문에 화용지와 채색도 구해주었습니다. 내일부터는 포로수용소의 전경을 그리게 되었습니다...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이쾌대는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꽃다웠던 화가의 부인은 팍팍한 생활고 속에서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다가 1980년에 작고했고, 이쾌대 역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월북한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북한에서 형 이여성의 몰락과 연관해, 이쾌대 역시 북한의 주류 미술계에서 급격하게 멀어졌음이 짐작되며 1999년 증보 발행된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간단한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월북 이후 <박연초상>(1956), <3.1운동>(1957), <농악>(1957), <우의탑 벽화>, <소녀>(1959), <송아지>(1961),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1961) 등의 작품이 화가의 후반부 화업에 첨가되었고 위 천공으로 1965년 사망 당시까지 남아있었던 유작들은 주변인들에 의해 산일되었다고 한다. 시대를 바라보며 그 안의 사람들의 모습과 역사적 드라마를 구축했던 이쾌대의 절정기 작업과 이들 후반부 작업은 어떤 연결점이 있을 수 있을까. 다만, 어떤 체제와 환경 아래서 제작되었던 간에 화가 이쾌대는 여전히 그가 발 딛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을 응시하며 예술혼을 담아내고자 했을 것 같다. 월북 이후의 정확한 기록과 작품의 행방은 향후 복원해야 되는 과제로 남아있다.

 

지난 2010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에게 그림을 배웠던 이주영의 존재가 등장하면서 다시금 이쾌대의 한국전쟁 시기의 빈공백이 채워지는 일이 있었다. 2008년에 이미 작고한 이주영의 증언을 건네 들은 고인의 아들에 의해 이쾌대의 월북은 이념에 의해서가 아닌,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음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 이주영은 포로교환 시기, 수용소 내부에서 치열한 이념갈등이 있었고 이쾌대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막사 밖에도 나올 수 없었다고 생전에 증언했다고 한다.

 

이주영은 1951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를 만나 1년 여간 그림을 배웠고 휴전쯤 이쾌대와 작별하며 몇 점의 드로잉과 해부학 교재, 서울에 남겨진 부인을 그리워하며 제작한 목조상을 건네받았다고 한다. 이주영은 평생 스승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들 유품을 소중히 보관해왔다.

 

도판16-17. 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가 제작한 미술해부학 교재

 

이쾌대는 수용소 일과를 마친 후, 시간을 쪼개 인물이나 정물을 스케치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본 미군들이 그림을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주영의 해부학 교재로 제작된 갱지 44쪽에 그려진 해부학 도해서는 이쾌대가 수용소에서 틈틈이 인체의 두상과 몸 골격 등을 만져가며 제작된 미술교재로 설명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해부학의 개론적 내용과 인체를 구성하는 골격과 근육 등 주요 형태별 도해가 수록되어 있고 특기할 점은 인물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안면에 대한 분석과 고찰이 상당 부분 할애되고 있는 점이다. 이 해부학 교재를 통해 이쾌대가 인물화 제작에서 어떤 지점까지 예술적 성취를 추구하고 발전시켜 나갔는지 역산할 수 있으며, 그의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군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격동기를 살아간 한 화가의 응시를 통해, 그 어떤 역사서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한국 근현대를 통찰하게 되는 것 같다. 회화적 재현이, 화가의 개인적 응시가 시대와 조우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이쾌대가 구현해낸 인물들은 개인이면서 당대의 리얼리티를 체현한 인물로서, 이념적 갈등과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시대를 상징하고 있다. 화면 속 인물군상의 격정과 기쁨, 슬픔과 시대에 반응하는 모습 속에서 어느덧 한 시대의 초상과 그를 초월하고자 노력한 작가의 시선을 맞닥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일생과 작품 변천의 연대기를 크게 학습기(1929-37)’, ‘모색기(1938-44)’, ‘전성기(1945-53)’로 구분해 구성하였으며 시기별 주요작품과 주요 아카이브 자료를 함께 병치하는가 하면, 유족 소장의 미공개 드로잉 가운데 150여 점이 선별되어 함께 전시되었다. 또한 작가가 돈암동에 개설한 성북회화연구소 시절(1946-1950)의 제자였던 서양화가 김창열, 심죽자, 김숙진, 조각가 전뢰진의 인터뷰 영상도 함께 전시되어 이해를 돕고 있다.

 




#저자 약력
정호경(鄭好耕) 1971 서울생. 시각문화연구. SAMUSO, 대림미술관 학예실을 거쳐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학예사로 근무, 우리나라 시각문화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번역서 『시각과 예술』. sonicbath@gmail.com
글쓴이 : 정호경
작성일 : 201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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