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n Menu Body
플랫폼
웹진 검색하기          상세검색

 <b>크리티카</b>
HOME > 크리티카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 Charles de Castelbajac, 패션과 미술 사이에서 핀 실용 혹은 무용
통권 : 52 / 년월 : 2015년 7,8월 / 조회수 : 3341
전시-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 (블루스퀘어 네모, 6월 12일~26일)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 Charles de Castelbajac, 패션과 미술 사이에서 핀 실용 혹은 무용

전시-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 (블루스퀘어 네모, 612~26)

 

우디킴

 

패션과 예술, 이 두 세계는 많은 것이 맞닿아 있다. 잘 만들어진 드레스를 보며 우리는 종종 예술적이라는 찬사를 보내지 않는가. 문제는 예술적이라는 찬사를 환상적이라는 형용사와 바꿔 배치해도 문장 전체의 의미 변화는 대동소이하다는 데 있다. 예술이 반드시 매우 아름답다거나 숨 막히게 정교하다는 의미로 치환되지 않는 오늘날의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예술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감탄사에 불과하다.

 

굳이 나누자면 패션은 실용(實用)의 세계에 예술은 무용(無用)의 세계에 기반한다고도 볼 수 있다. 입을 수 없는 옷은 그 존재의 당위를 저버리는 것이다. 무용의 권위가 실추된 세계에 예술이란 단어는 감탄사 이상으로 쓰이지 않는다. 이것이 확고한 실용의 세계에 뿌리를 내린 패션디자인과 절대적 무용에 세계를 지배하는 예술이 극명하게 갈리는 노선이다. 이 두 세계 사이에는 쉽사리 건너기 힘든 대양이 흐른다.

양분된 이 두 세계에 기묘하게 양 발을 걸치고 있는 이가 있다.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 레이디 가가와 비욘세의 사랑을 받으며 동시에 교황과 추기경의 예복을 디자인한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다. 본인의 이름을 내건 패션 하우스를 일궈 40여 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해온 몇 안 되는 패션디자이너다. 칼 라거펠트조차 본인의 브랜드로 명성을 쌓은 디자이너는 아님을 떠올린다면 이런 디자이너는 프랑스에서도 흔치 않다. 만약 비슷한 경우가 있다면 이브 생 로랑과 무슈 디올, 코코 샤넬 정도다. 그는 존재 자체로서 이미 프랑스 패션계의 살아있는 신화다.

 

패션디자이너로서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예술가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A)에서 전시를 열었고 파리 국제 현대예술 박람회(FIAC)의 초청으로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전시를 가졌다. 크리스티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카니야 웨스트 등 굵직한 컬렉터들을 데리고 있다. 미술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말대로라면 50년은 족히 그림을 그린 셈이다. 1970년대, 말콤 맥라렌으로부터 펑크의 정신을, 바스키아로부터 강렬함을, 앤디 워홀로부터 팝의 개념을 이해했다. 붓을 들기 망설이던 그에게 예술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이는 키스 헤링이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들과 교류하며 예술의 사회적 의미에 천착해왔다.

 

키스 헤링과 함께

패션디자이너와 예술가, 그는 이 두 정체성에 관해 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당연하리라. 산업혁명 이후 우리의 정체성은 명확한 변별과 측정을 위해 개량되어 왔다.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우리는 더욱 단순해지고 정확해져야만 했다. 유용가치는 곧 개체를 대변하고 개별 부품은 스스로의 실용성을 입증함으로 그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가능한 한도 내로 개체는 한 줄로 요약 가능한 정체성을 강요받아온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상당히 다른 두 영역의 명패를 등에 업는다는 것은 범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상이한 두 영역도 그것의 실행주체에 따라 때론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까스텔바작이 그 좋은 예일지 모른다. 젊은 시절, 까스텔바작은 프랑스를 찾은 교황과 주교, 신부 그룹을 위해 특별 예복들을 디자인해줄 것을 바티칸으로부터 요청 받았다. 교황의 예복 디자인을 의뢰 받은 세계 최초의 디자이너, 두말할 것도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작업에 착수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예복 디자인이 탄생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교황, 주교, 신부 그룹이 너무도 확연히 구분돼 가톨릭의 계급적 세계관을 더욱 견고히 드러내는 듯한 예복 디자인이었다. 우려와 함께 마침내 예식은 거행됐다. 그의 예복을 입은 신부와 주교 그룹이 자리를 잡고 뒤를 이어 교황이 등장했다. 그리고 교황의 등장에 전 세계가 술렁였다. 교황의 예복 디자인이 가장 아래 단에 위치한 수 만 명의 청년 신도들이 입은 티셔츠와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는 이에 열광했고 교황은 그에게 눈물로 화답했다. 단 한 명의 아티스트가 가톨릭 전체가 안고 있었던 고질적 계급 문제를 가장 우아한 방법으로 세계에 공론화한 것이다.

 

여기에 다른 두 세계의 정체성에 대한 답이, 아니 또 다른 질문이 있다. 까스텔바작이 정말 단순히 예복을 디자인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그의 철학을 펼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 어쩌면 이런 점이 그를 더 주목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까스텔바작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에 숨은 작은 비밀을 먼저 이해하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이다.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 Charles de Castelbajac), 그의 이름 중간에 붙은 de는 프랑스에서 귀족을 의미한다. 그의 아버지는 1,000년을 넘게 내려온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적출이었고, 어머니는 당시 섬유공장을 운영했던 프랑스 최초의 신 여성이었다.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의 결합.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7살 때부터 17살 때까지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일중독이었던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때조차 그를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아직 인형을 안고 자던 어린이는 모두가 떠난 학교에서 수위아저씨와 단 둘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만 했다. 지금도 그는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간의 작품세계에서 그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해, 인간성에 관해 전통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대해 언급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들이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것은 아니다. 1960~70년대를 겪어온 프랑스 지성인답게 수평적 사회를 향한 유토피아적 메시지들을 캔버스 위에 쏟아낸다. 세계가 유토피아의 열망에 들떴던, 히피들이 거리를 메우고 좌파 운동이 거셌던 그 시절의 향수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태동하던 포스트모던의 염세주의에 젖지 않은 채 그는 그만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사실 귀족가문의 도련님이 웬 수평사회 운운하나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는 왕을 단두대에서 처형했던 나라다. 모든 신분제를 강력하게 철폐했으며 비 공산권 유럽국가 중 가장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곳에서 귀족 가문의 피란 더 이상 특권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특권이 아닌 보존해야 할 전통의 역사로 본다.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변해가는 현재를 그는 우려하지 않는다. 차분히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그래서일까, 그의 예술이 추구하는 수평적 세계관엔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유토피아적이고 평화적인 메시지와 도시인의 고독을 보듬고자 하는 따스한 마음, 철저하게 홀로 남겨졌던 어두웠던 유년시절의 반작용 덕인지 그는 작품을 통해 밝은 메시지들을 전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어두웠던 그늘들은 그의 그림 곳곳에 숨어 있다. 수평적 사회를 꿈꾸는 프랑스 지성인의 캔버스엔 혁명의 시기에 귀족가문으로서 겪었던 역차별의 아픔들이 녹아 있다. 이런 사회적 메시지들과 예술가 개인의 역사의 충돌이 강렬한 원색들과 만나 서로 으르렁대며 불꽃을 튀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평생에 걸친 이런 번민들이 결국 오늘날 예술가로서의 그를 만든 것이다.

 

까스텔바작은 향년 65세다. 정해진 틀 안의 삶을 편안하게 느낄 수도 있는 나이다. 스스로가 속한 세계의 질서가 체내에 깊이 각인되어 더 이상의 구조적인 질문을 소화하기 힘들 수도 있는 나이다. 익숙함과 변화 사이에서 익숙함을, 저항과 안주 사이에서 안주를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할지도 모르는 나이다. 버릴 수 없는 게 많아져 움켜쥐고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그런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까스텔바작은 끊임없이 시도하고 도전하고 바꿔나간다. 흔히 시대정신과 저항정신으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의 세계관을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이 연륜이 빚어낸 지혜와 더불어 공존하고 있다. 저항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평화를 강조하고 절대적인 사회평등을 주창하며 전통적 가치의 숭고함을 역설하고 있다.

 

수 없이 부딪혔을 터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선동가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사회 구조적 모순의 개혁을 언급하기에 그의 태생은 너무 고결했다. 소수를 위한 오뜨 쿠튀르 디자이너가 평등을 거론하기에 그 거리가 다소 먼 감이 있었다. 스스로가 지고 있었던 태생적 모순을 견딜 수 없이 고민 했을 터였다. 그의 평등을 향한 세계관은 줄기차게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사회를 향한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힘없이 돌아왔다. 그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그는 이를 사십 년이 넘게 반복했다. 결국 반복은 어떤 흐름을 낳고 메아리는 깊은 울림을 공명했다.

 

그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 그의 작품들은 그래서인지 어떤 종류의 자신감이 배어나 보인다. 그것은 내가 옳으니 너를 가르치겠다는 오만은 아니다. 어지간한 충격엔 미동도 않겠다는 강골의 근성이다. 그렇지만 따뜻하다. 되려 욕망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그 또한 인간 본연의 특질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수평적 사회를 향한 그의 주장엔 극단성이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균등 분배의 꿈이 전복된 이 세계에서, 이상을 향한 동유럽의 실험이 실패의 상흔만을 남긴 이 세계에서, 어쩌면 정말로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그는 진실로 저항을 지지하고 순수하게 다름을 인정한다. 모순을 부정하는 대신 그것을 대면하는 길을 택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영역 사이에서 진중하게 흔들리는 법을 터득했다. 그는 말한다. 상반되는 이 두 세계 사이에 어떤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고. 오뜨 쿠튀르를 위한 패션 디자인과 수평적 사회를 역설하는 미술을 함께 병행하는 이 남자, 왠지 이해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저자 약력
김성우(Woody Kim)
1983년 여수 출생. 런던 골드스미스대학교에서 순수미술 전공. 현재 작가 겸 아트딜라이트(ArtDelight)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 전시 등을 기획했고, 2015 베니스 비엔날레 ‘베니스, 이상과 현실 사이(Sleepers in Venice) 전시에 참여하는 등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하고 있다.
woodywoodykim@gmail.com
글쓴이 : 우디킴
작성일 : 2015/07/14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