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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신화 지도, 어떻게 그릴 것인가 1)
통권 : 50 / 년월 : 2015년 3,4월 / 조회수 : 2422

1. 신화와 스토리텔링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왜 죽음을 피할 수 없는가. 죽은 다음의 세상은 무엇인가. 문명의 발달에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오래도록 비합리성의 대명사처럼 간주했던 신화를 다시 호명해내기에 이르렀다. 신화에서 인류의 원초적인 집단무의식을 읽어낸 심리학자 칼 융이나 원시사회의 연구를 통해 신화의 의의와 기능을 적극적으로 밝혀낸 구조주의 인류학자들도 이런 관점에서 거론될 수 있다. 나아가 저명한 비교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 같은 이는 살아 있는 신화가 아직도 현대인에게 행위의 모델이 되고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디지털문명의 발전은 새로운 차원에서 신화에 대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중심에 <반지의 제왕><해리 포터>가 있다. 북유럽 신화와 켈트 신화에 크게 기대고 있는 이 작품들은 도서 시장을 넘어서서 영화, 게임, 음악, 공연 등 문화산업의 전 영역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이로 인해 신화는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라는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때 스토리텔링은 좁은 의미에서 이야깃거리혹은 이야기 들려주기의 차원일 수도 있지만, 좀 더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히틀러를 피해 조국을 떠난 한나 아렌트는 전대미문의 파시즘이 어떻게 출현했고 어떤 기제로 작동하는지,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찰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주목한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자체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창조 활동으로, 일련의 사건들은 특정 서사 형식 속에 놓임으로써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에 따라 많은 청중과 소통하고 공동체에서 기억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경험을 애써 다시 떠올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허황된 목표를 위해 인간성을 왜곡하고 파괴하려던 나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지나간 행동의 기억을 보전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미래를 위한 상상력의 원천으로 만드는 것이 시인과 역사가의 정치적기능이라고 말했다.

 

 

2. 동서양 스토리텔링의 비대칭성

 

이런 점에서 볼 때, 인류의 역사는 불행히도 스토리텔링의 지독한 비대칭성 혹은 불균형성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데 주목해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역사라는 말 자체가 이미 상당히 많은 것을 배제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예컨대 신화와 그 밖의 많은 구비전승이 오래도록 그런 배제의 메커니즘에 희생양이었다. 신화를 가리키는 뮈토스’(mythos)는 본래 '' 혹은 '이야기'라는 뜻이었는데,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신들의 행위를 노래로 부른 운문 형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따라서 세상을 묘사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말로서, 참과 거짓이라는 논증의 의무로부터는 자유로웠다. 반면 로고스’(logos)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산문 형식의 말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분명히 가려야 했다. 그런데 이후 서양의 역사가 로고스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뮈토스는 거짓, 가짜, 허구와 같은 의미로 폄훼될 수밖에 없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褪於日光則爲歷史, 染於月色則爲神話)”라는 말이 있지만, 달빛은 늘 햇빛에 자리를 내주었던 게 서양이 끌고 온 대개의 현실이었다. 질서와 논리는 혼돈과 주술을 밀어냈고, 의식은 무의식보다, 일신교는 다신교보다 우월했다. 이럴진대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 따위가 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나아가 민족, 계급, 젠더, 지역 등에 따라 스토리텔링 자체가 봉쇄되거나 왜곡, 축소, 폄하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에는 마땅히 역사라고 부를 만한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가 있었다. 있다면 오직 암흑의 역사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때 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무수한 노인들이 몇 세대에 걸친 자기 부족의 역사를 송두리째 기억하는 살아있는 도서관이자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셈이다. 기록이 구술보다 우월하다는 말은 참이 아니다. 이는 물론 아시아의 노인들, 나아가 세계사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다른 모든 지역의 노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쯤에서 루카치에 기댄다.

-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마나스 동상

그렇지만 지도나 내비게이션으로도 쉽게 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신화는 과거 바로 이 별이 우리에게 해주었던 것과 같은 구실을 해준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아시아 대륙에는 여전히 영혼의 불꽃과 별빛, 그리고 이야기의 전통이 살아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령 그리스로마 신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마하바라타>, <게세르>, <마나스>, <구르굴리>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것들이 <일리아드>, <오디세이>보다 훨씬 긴 서사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혹은 인류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가 바이블에 훨씬 앞서 인류 멸망의 대홍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또 얼마나 될까. 인도의 <라마야나> 서사시는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들 만큼 흥미진진하다. 왜 아니겠는가. 거기서는 시간부터 쩨쩨하지 않다. 1칼파, 432천만 년을 한 주기로 우주가 한 번씩 바뀐다. 왕은 6만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 왔기에 이제 좀 쉬고 싶어 하며, 심지어 악귀조차 발심하면 물구나무선 채 천년만년 용맹정진한다.

우리는 <라마야나>와 같은 신화 혹은 서사시들을 통해 아시아의 서사가 무엇인지 그 넓이와 깊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건 당연히 그리스로마 신화만을 끼고 살던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을 동반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아시아의 대지에 살면서 우리는 아시아를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성의 결과가 지난날 청년 앙드레 말로를 격정에 휩싸이게 했던 그 아시아, 그 오리엔트는 아니기를 기원하자. 말로는 청년 시절 앙코르의 아름다움에 반한 나머지 도굴꾼이 되었다. 파리에서 동양어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내와 함께 크메르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반테이 스레이는 붉은 사암을 건축 재료로 했기 때문에 사원 전체가 불붙는 듯한 느낌을 던져주었다. 그는 망치와 끌을 사용하여 압살라(무녀) 상을 인정사정없이 쪼고 때리고 깎아서 떼어냈다. 그런 다음 물소 달구지를 이용하여 밀림 밖으로 반출을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된다. 그는 그 감동을 장편소설 왕도로 가는 길로 남겼으며, 드골 치하에서 문화부 장관까지 지낸다.

조지 오웰은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로 지낸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밝힌다.

- 열대 지방에서 우리의 눈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에 고정된다. 바싹 마른 토양, 부채선인장, 야자수와 멀리 보이는 산, 이런 것들만 쳐다볼 뿐 언제나 땅을 파는 농부들은 보지 못한다. 농부의 피부는 땅과 같은 색깔이라 전혀 쳐다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중략) 몇 주 동안 항상 같은 시간에 한 무리의 노파들이 장작을 등에 지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내 집 앞을 지나갔다. 비록 나의 눈에 각인되었더라도 나는 그들을 보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장작더미가 지나갔다고밖에. 그것이 바로 내가 그들을 본 방법이다.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이 게르만 철학의 챔피언 헤겔이다. 그에게,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지만, 자의식이라고 하는 내적인 태양은 서방에 출현할 뿐이고 그때 현실의 태양보다도 훨씬 빛나는 광휘를 내뿜는다. 역사 또한 이성의 간지에 따라 단선적인 행로를 밟을 따름이다. 헤겔이 계속 말한다.

- 동양인은 아직도 정신 또는 인간 그 자체가 그 자체로서 자유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단지 한 사람이 자유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중략) 게르만계의 제 국민에 이르러서 비로소 기독교 안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모든 인간) 자유이며, 정신의 자유가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는 의식이 획득되었다.

 

3. 아시아의 신화를 제대로 보는 방법

 

그렇다면 아시아를, 그리고 아시아의 신화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유목 생활을 하는 키르기스인들은 서사시 <마나스>를 자랑한다. 그들은 그것을 키르기스 정신의 정점이자 키르기스 문화의 백과사전이라 부른다. 무엇보다 <마나스>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키르기스 국가 건설 과정에서 키르기스인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구심점 구실을 했다. 소비에트 체제를 거쳐 오는 동안에도 <마나스>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조금도 훼손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키르기스인들은 오십만 행에 이르는 가장 긴 <마나스> 판본의 경우 <일리아드><오디세이>를 합친 것보다 스무 배나 길며,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보다도 두 배 반이나 길다고 주장한다. 조동일은 키르기스의 서사시 <마나스>는 분량이 대단하고, 내용이 다채로우며, 민족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세계 서사시 일반론을 전개할 때 반드시 살펴야 할 아주 소중한 작품이라고 했다. 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의 국제공항 이름도 마나스이니, 그 나라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마나스>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이 <마나스>를 이토록 자랑스럽게 여기고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놀랍게도 그것을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공식화한 것은 키르기스스탄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중국은 2009<마나스>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동서남북의 공정(工程)들을 통해 소수민족들의 민족문화를 중국화하려는 행보는 <마나스>마저 중국 3대 서사시 중 하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해가는데 독수리 자타유가 달려든다. Raja Ravi Varma 그림(1895).

- 중국 서부의 신장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키르기스족은, 영웅 마나스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대표적 구술 전통 중 하나인 <마나스> 서사시는 그의 일생과 자손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키르기스족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자 그들의 전통과 믿음의 표현이다. (중략) 이 서사시는 중국 3대 서사시 중의 하나로서 걸출한 예술작품인 동시에 키르기스 사람들의 구술문화를 집대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 경우는 다른 사례를 제공한다. 방글라데시는 인구가 무려 일억 육천 명이지만 일인당 국민소득은 기백 달러에 불과한 아주 가난한 나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한 소수민족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의 창세신화를 갖고 있다. 거기에서는 지렁이와 가재, , 거북 따위 짐승들이 서로 힘을 합해 세상을 창조해 낸다. 전지전능한 남성적 창조주가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기존의 대다수 창조신화와는 전혀 다르다. 영웅보다는 미물들의 상호 협력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해 온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로써 방글라데시는 경제력과는 상관없이 인류가 꾸려가는 문명의 역사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인도 신화를 보자. 인드라는 신들의 세계에서 세 명의 주신에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아수라의 왕 브리트라와의 대결에서는 번번이 패배의 굴욕을 맛본다. 보다 못한 신들이 찾아가 중재를 하자, 완강히 거부하던 브리트라가 마침내 조건을 내건다.

앞으로 인드라는 나무, , 쇠 어떤 것으로도 나를 공격하지 말라. 물에 젖은 것으로도 마른 것으로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낮이든 밤이든 공격해서도 안 된다.”

인드라가 수락하자, 브리트라는 즉시 싸움을 중지했다. 그러나 그동안 당한 굴욕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인드라는 복수를 꿈꾸었으니, 어느 날 땅거미가 질 무렵 바닷가에 서 있는 브리트라를 발견했다.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최고신 비슈누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비슈누는 그의 기도에 응답했고, 천하의 브리트라도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필이면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이 저녁 어스름에, 나무도 돌도 쇠도 아닌, 그렇다고 젖은 것도 마른 것도 아닌 고작 하얀 물거품 때문에 내가 죽다니!”

인드라는 비슈누로 하여금 거품 속에 들어가 달라고 기도했고, 그런 다음 그 거품을 브리트라에게 힘껏 던졌던 것이다. 천하의 브리트라인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드라가 얄밉기는 하지만 약속을 어긴 건 아니었다. 그의 무기는 별 볼일 없는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신들의 교지이자 신화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지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경계성(liminality)’이 지닌 위력이다. , 사이, 문지방에서 빈번이 일어나는 전도와 역전. - 신화는 이분법에 기초한 합리주의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해결책을 우리에게 던져줄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의 신화에는 위계적 질서에 바탕을 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식의 상상력이 무궁무진하다. 이것이 우리가 새삼 아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아시아 신화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런 노력과 작업이 자칫 지난날 앙드레 말로나 다른 숱한 제국주의자들이 범했던 우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문학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도 이 지점이다. “어떤 특정 지역이 세계의 중심인가, 마을마다가 각각 세계의 중심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지만, 설령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소중한데, 왜냐하면 적어도 이런 물음을 던지고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가 역사에 대해 또한 인간에 대해 겸허해지기 때문이다.

 




#저자 약력
소설가. 한국외국어대학 네덜란드어과 졸업.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 『청년일기』 소설집 『산을 내려가는 법』 『천하무적』, 소년소설『모래도시의 비밀』등이 있다. 아름다운작가상, 제비꽃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2012년 권정생 창작기금을 받았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과 ‘한국-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아시아문화네트워크’ 책임연구원이다.
bayon@dreamwiz.com
글쓴이 : 김남일
작성일 : 201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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