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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사태 그리고 정념의 휘발에 대한 노트
통권 : 49 / 년월 : 2015년 1,2월 / 조회수 : 2092

나는 공포의 촉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시간이란 잔인하게 흘러간다는 공포. 너는 특별히 필요한 존재로서 이 세계에 초대된 건 아니었다는, 폭력적인 한 마디로 이쪽을 없애버리고, 그런 일 이후에도 별 변화 없이 지속되어 가는 이 세계. 젊었을 때 익숙했던 그 감회가 그대로 되살아나, 외지에 와 있는 중년 남성으로서의 나를 또다시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오에 겐자부로, [인생의 친척]

 

1. 시간은 잔인하게 흘러간다

 

세월호 사태(나는 ‘사태’라는 표현 이외에 어떤 말도, 그 날로부터 시작된 일들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참사라는 말은 ‘완료된 사건’의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이 일들을 지칭하기에 부족하다)가 잉태한 정념들이 사회의 무대에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듯 보이는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다.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몇 백 명의 승객들이 좌초한 배에서 산채로 수장되는 것을 온 시민들이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거기에는 구조도 구조의 주체로서 총체적 책임을 져야 하는 국가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상식은 한 번도 경험된 바 없었다. 국가란 언제나 ‘명령’했으며 ‘폭력’을 휘둘렀을 뿐이다. 87년 이후 폭압적인 국가권력의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국가를 ‘보호’로 경험하는 것은 낯선 일에 속한다. 이는 민주화가 지펴낸 신기루이며 그저 농담과도 같다. 하지만 농담으로라도 신기루처럼 상상해보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무의식적 희망과도 같은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공포스럽게도 국가는 무능하다. 이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순간에 온전히 부재하는 방식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이외에 달리 세월호 사태에 국가를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우리의 삶이 사회성과 공공성을 결여했다는 의미에서 이기적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결과 타자를 자신과 긍정적인 방식으로 동일시할 수 없는 공감 능력의 부재가 오늘의 삶에 넘쳐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가 공동체로서 존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어떤 정서적 공감과 동일시의 토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족이며 부모와 아이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끝까지 손잡고 있는 공감의 토대이자 마지막 공감의 실체인 아이들이 너무도 많이 죽었다.

세월호 사태가 사람들에게 참사라는 이름으로 분노와 비탄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와 같은 사태의 특징, 즉 민주주의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의 완전한 부재와 공동체의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죽음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의 정치와 역사 그리고 그것들이 교차하며 직조해낸 우리의 삶 자체를 가장 심각한 수준에서 반성하게 만드는 비극적인 상징이다. 또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역사의 어떤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정념은 사람들을 모아냈지만 8개월이 지난 지금 어떤 반성과 제도의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전에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속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이 비극에 짓눌려 마치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을 잃어버린 공포의 촉감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간은 잔인하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무엇이든 구조하기 위하여’ 고여 있어야 할 것들이 때 이르게 날아가 버리는 이 상황을 정념의 휘발이라는 문제로 기록하려고 한다.

 

2. 어떠한 사회적 정념도 휘발할 것이다

 

정념의 휘발로서 사태를 말하기 위해 정념에 대한 몇 가지 사항들을 숙지해보자(우리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에게서 이 사항들을 끌어오지만 짧은 글의 특성상 일일이 출처를 따로 표기하지는 않겠다). 감정 혹은 정념passionem animi, 어떤 말로 부른다 해도 상관없다. 언제나 그것은 우선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들이 우리의 신체에 원인이 되어 남긴 흔적과도 같다. 우리는 이 결과들을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경험한다. 즉, 좋은 경험과 슬픈 경험. 그렇다면 한 정념의 힘은 어디까지 자신의 지속을 전개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정념이 결과라는 점에서 정념 그 자체에 의해서 설명될 수는 없고 그러한 정념을 남긴 원인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념의 힘은 외부 원인의 힘 만큼이라고 가늠해볼 수 있다. 어떤 정념은 그것을 불러일으킨 원인만큼의 강도와 지속성을 지닐 것이다. 어떤 강한 원인이 남긴 흔적은 좀 더 강한 충격으로 좀 더 오래가고, 어떤 약한 원인은 좀 더 약한 충격으로 좀 덜 오래갈 것이다. 그리고 정념들은 사라지는 것을 포함해서 변한다. 어떤 정념을 불러일으킨 원인보다 강한 원인이 우리에게 작용한다면 우리는 다른 정념을 갖게 될 것이며 이전의 정념의 강도와 지속성은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같은 계열의 정념이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엎친 데 덮친 격”).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의 변화들은 모두 이에 부합한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고 슬픔 뒤에 기쁨이 온다. 때로는 기쁨과 슬픔이,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오며, 아주 드물게 슬픔은 보다 큰 슬픔에 의해, 기쁨은 보다 큰 기쁨에 의해 강화된다.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념의 끝없는 순환은 바로 우리의 정념적 삶 그 자체와도 같은데, 이는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많은 경험 속에서 (드물게!) 원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나 무엇인가에 원인으로 작용하거나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나 무엇인가에 의해 결과로서 작용 받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정념의 힘이 영원할 수는 없으며 정념의 순환을 피할 수도 없다. 더 이상 원인도 결과도 될 수 없는 상태란 (편의상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신체적 의미에서든 정신적 의미에서든 죽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평생 동안 간직하며 그것이 남긴 흔적으로서의 정념만을 역시 평생을 간직하는 어떤 인물(‘들린 사람’)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병리적인 차원이거나 상상 속의 인물을 그려내는 문학작품의 차원일 뿐이다. 현실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정념적 순환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어떤 원인은 한 개인에게만 흔적을 남기지만 어떤 원인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일이 누군가의 개인적인 비극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비극으로 이해될 때 그것이 만들어낸 정념 또한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정리로 세월호 사태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 세월호 사태의 사회적인 정념이 강도와 지속성에 있어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휘발되어버린 것은 세월호 사태라는 원인이 그만큼 밖에 안 되어서일까? 둘째, 세월호 사태의 정념을 가라앉히는 보다 강한 정념을 유발하는 더 큰 원인이 세월호 사태 이후에 존재했는가? 묻자마자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몇 백 명의 사람들이 국가의 무능이라는 책임의 부재 속에서 죽어간 것은 잠시의 충격일 뿐, 한 사회의 구조에 대해 반성하고 그것을 변형시킬 만한, 즉 사회의 근본 정서의 지형을 뒤흔들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는 아니며, 따라서 어쩌면 (극히!) 일부만이 느끼는 슬픔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회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사태에 대한 사회적 정념의 예상치 못한 반응양식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생산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생산할) 비극적 사태에 대한 사회의 잔혹한 정념적 소비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의 비극적인 사회적 정념이 발생한 후에 그것의 지속을 방해하는 다른 어떤 정념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는 아닐지라도 사회적 정념은 휘발이라는 사태에 마주하게 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아무리 사람들이 용인할 수 없는 잔혹한 방식에 의해 죽는다고 해도 이 슬픔은 사회적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며 어떤 사회적인 정념도 그것이 온당하게 순환되기 이전에 무력화될 것이다. 잔혹하지만!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자명한 공리axioma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사회 속에서 살아온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에 따라, 정념의 휘발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정념적 교통의 가능성과 한계를 제한하는 우리 사회의 공통 감각sens commun이 되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한국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삶에서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유용한 하나의 인식, 즉 공통 통념notio commmunis으로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3. 다시 공포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막아야만 한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애도 없는 매장을 막아야 한다. 일시적이거나 해마다 반복되는 의례로서의 묵념과 슬픔이 애도의 전부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또 다시 반복될 비극은 그와 같은 묵념과 슬픔을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 뿐이다. 애도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존중과 충실한 기억을 의미하는 한에서 반복되는 비극은 타자의 타자성, 죽은 이들의 죽음에 대한 부정과 다르지 않다. 마치 죽음이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또 다시 죽어갈 것이다. 이 구원할 수 없어 보이는 망각을 도대체 어떻게 깨어버릴 것인가? 어떻게 애도해야 할 것인가?

사회적인 정념에 가장 잘 부합하는 애도는 바로 타자의 타자성, 죽은 이들의 죽음을 제도에 새겨 넣고 그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신체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나날의 삶 속에서 그 슬픔을 전이된 형태로 경험하게 하며 우리의 사회적 제도와 신체 속에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비극을 상시적으로 상영하는 사회와 제도를 바꿔낼 것인가?

물론, 정념의 휘발이 한국 사회의 공통 감각이 되었을 때 그것은 아직까지, 더 이상 어떤 독특한 국면을 형성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그렇지!’라는 패배주의적 탄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비극 앞에서 타오르는 일회적인 정념의 존재 양상만을 의미하게 된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듯이 사회적인 정념은 그렇게 밀려오고 밀려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더 심각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대중들의 문제이다. 정념은 일정한 방식으로 대중들의 일부를 포획하여 집합화한 특정한 대중, 즉 정치적 주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주체가 항상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정념은 이러한 집합적 주체의 형성과 해체의 가변적 토대이기 때문에 정념에 따라 형성된 주체는 휘발이라는 공통 감각이 제한하는 정념의 운동에 의해 형성과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정념의 결과로 형성된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들은 비극을 애도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념을 통한 대중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형성은 (언제나!) 이미 실패할 과제에 도전하고 만다. 그들은 제도를 변경하는 데 (어쩌면!) 영원히 실패할 것이다(물론 우리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대중의 형성에 정념만이 유일한 매개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념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대중을 형성하는 데 있어 쉽사리 부정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중운동을 통한 애도란 불가능한 일일까? 적어도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는 사고를 전개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대중이 특정한 국면에서, 정념이라는 가변적 토대 위에서 형성되는 정치적 주체라면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불변적 토대 위에서 형성되는 정치적 주체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운동은 변수와 같이 등장하며 노동운동은 상수와 같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연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변수적 대중운동과 상수적 노동운동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실현을 비극적인 사회적 과제로서 제기하는 연대를, 비극에서 태어난 정념적 대중운동과 연대하는 노동운동을, 또 언젠가 노동운동과 연대하는 대중운동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일들이 그저 부정적인 의미에서 상상에 속한다고 말할 정도로 민주주의의 좌표는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고 국가가 무능한 만큼이나 (잠정적인 범위로 말해서) 우리 또한 무능하다. 하지만 언젠가 비극 속에서 태어난 어떤 정념적 주체들이 정념의 휘발에도 불구하고 망각을 거슬러,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주체성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역사의 우발성에 맞서 사회의 운명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을 것이다.






#저자 약력
정재화 1973년 서울 생.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강사. spinidel@daum.net

글쓴이 : 정재화
작성일 : 201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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