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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적 공동체를 위한 흐르는 예술
통권 : 46 / 년월 : 2014년 7,8월 / 조회수 : 4079

1. 공동체 기반의 예술

 

최근 ‘공동체 기반의 예술’로 불리는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는 중앙정부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2006년 ‘열 개의 이웃’ 커뮤니티 아트 지원 사업에서 ‘커뮤니티 아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경기문화재단도 최근 많은 수의 ‘공동체 기반의 예술’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2005년 문화예술교육진흥법이 발효된 이후로 문화예술교육 혹은 문화 복지 사업 영역에서도 ‘커뮤니티 아트’ 유형의 작업 사례들을 찾아 볼 수 있어서 그야말로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수행하는 대부분의 문화 사업은 ‘커뮤니티 아트’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이렇게 많은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들에 간여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프로젝트에서 지역주민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우선되는 ‘커뮤니티’와 창조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아트’가 어떤 관계에 놓여야 하는지, 그리고 이 관계는 얼마나 어떤 상태로 지속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경기문화재단은 2011년 ‘커뮤니티 와 아트’라는 콜로키움을 통해서 ‘커뮤니티아트’라는 일반명사 사이에 ‘와’라는 접속사를 넣어서 ‘커뮤니티’와 ‘아트’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 콜로키움에서 우리는 최근 변화하는 ‘커뮤니티’의 속성을 밝히고 이 ‘커뮤니티’와 관계하는 ‘아트’의 다양한 형태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자료집의 서문에서 양원모 팀장은 “새 장르 공공미술”, “관계미학”으로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는 최근 커뮤니티 아트에 대해서 “커뮤니티 관련 예술이 세계적인 흐름과 호흡을 같이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한국사회에서 발화하고 전개되는 양태에는 우리만의 역사성과 특수성이 있는 듯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한편으로는 범세계적이면서 보편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이론적인 틀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특수성을 반영한 우리식의 미적, 사회적 잣대도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의 제안에서처럼, 커뮤니티 아트에 있어서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정의하고 명명할 것인지, ‘공동체’란 개념의 구분은 어떻게 할 것인지 여기서 예술가는 내부자로 존재할 것인지? 외부자로 존재하며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렵다.

 

2. 장소 특정적 미술

 

공동체가 유동적이고 일시적이라면 그러한 불안정적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동체 기반의 예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프로젝트들은 지역적, 사회적, 정치적 쟁점에 따라 그 성격이 명료하다 할 정도로 고착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삶의 다양성을 예찬하고 제도화된 예술에 저항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생겨난 ‘공동체 기반의 예술’이 어쩌다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고착화되고 있는 것일까? 재미 미술사학자 권미원은 그의 책 『장소 특정적 미술One Place after another1)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권미원은 그의 책에서 70년대 공공미술에서 “장소 특정적 미술Site specific art”이 커뮤니티아트로 전환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에서 장소 특정적 예술작업은 1960년대 중반 미 행정관리청(GSA)이 추진한 “건축 속의 미술프로그램”과 1967년 국립예술기금(NEA)이 추진한 “공공장소 속의 미술프로그램”에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2)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가들은 작품이 위치하게 되는 장소의 물리적, 사회적, 정치적 문맥을 활용한 “장소 특정적 미술”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술이 관계 맺게 되는 ‘장소’에 대한 전형화, 고착화와 같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적인 메트로폴리스들은 점점 더 균등해지고 도시의 정체성이 점점 희박해지면서 도시의 차별적 특징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문가들은 ‘매력적인 장소’, ‘도시의 구별적인 정체성’, ‘지역적 정체성’을 위해서 “장소 특정적 미술”을 동원하였다.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해 내는 ‘창조도시’ 전략에 예술은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장소 특정적 미술”은 도시를 관광으로 특화하는 장소 마케팅, 내지는 홍보에 동원되는 시기에 생겨났기 때문이다.3)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의 미 연방청 광장에 설치되었다가 철거된 <기울어진 호A tilted arc>는 ‘장소 특정적인 미술’이 제도비판적인 쟁점으로 옮겨 가게 했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세라의 <기울어진 호>는 장소 특정적 조각으로 구성되었으며 ‘장소에 따라 조정하거나 재배치 될 수 있는’ 모더니즘 조각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광장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사람들의 통행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커다란 철판으로 이루어진 작품 자체도 흉물스럽게 보였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철거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세라는 작업을 설치할 때부터 이 상황을 예견했다. 그의 작품은 장소의 일부가 되어 그 장소를 개념적으로도 지각적으로 재구성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시민들과 논쟁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업은 단지 물리적 공간에 설치된 작품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과정예술’로서, 제도비판적인 ‘장소기반의 예술’에서 ‘쟁점기반의 예술’로 넘어간다. 시카고의 미 연방청 광장은 이 사건 이후로 이 사건의 흔적과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미술작업과 장소 사이의 특정적인 관계는 세라의 경우에서처럼 그 관계의 물리적 영구성에 근거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될 수 없는 순간적인 상황으로 경험되는, 고정되지 않는 비영구적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4)

결국 ‘장소특정성의 계보’에서 ‘장소’란 고정된 작품의 위치, 즉 현상학적이고 물리적인 공간으로부터 미술에 의미를 부여하는 제도의 영역이자,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담론의 장으로 확대 되었다. 세라는 유동적인 장소를 상정하는 장소 특정성의 원칙을 ‘유목적’ 이라고 정의했다.5)

 

3. 공동체의 장소

 

권미원은 세라의 사례에서 출발해서 매리 제인 제이콥Merry jane Jachop이 1993년 시카고에서 기획한 <행동하는 문화: 시카고에서의 새로운 공공미술>과 연관해서 어떻게 공공미술이 장소로부터 공동체로 이동하게 됐는지 설명한다. 제이콥은 수동적인 관객을 적극적인 미술 제작자로, 관람자의 역할을 변화시키고자 했고, 작품을 물질적 오브제가 아니라 지역의 참여자와 미술가 사이의 일시적 상호작용 과정으로 끌어들였다. 수잔 레이시에 의해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로 명명된 “공동체 기반의 미술” 활동들은 정치권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곤경을 드러내고 그들을 변호하며 그들, 즉 미술가들이 인도주의적 가치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실현하려는 열망을 갖는다.”6)

권미원은 “장소 특정적 미술”에서 물리적 공간조차 유동적인 것을 확인했고 그러한 상상력이 “공동체기반의 미술”로 넘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했지만, “공동체 기반의 미술” 내에서 다시 본질화 과정이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공동체 기반의 미술” 활동들이 ”공동체를 규정하기 위해, 발생적 속성이건, 일련의 사회적 관심이건, 혹은 지리적인 영토이건, 하나의 공통성의 항목으로 고립시킨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고립화는 이 공통성의 항목을 공유하도록 가정되는 미술가들과의 동반 관계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는 ”결실을 얻기 위해서 관료주의에 의존하는 미술작업(말하자면, 공동체 기반 미술을 포함한, 제도적으로 승인된 공공미술)은 너무 잘 길들여져 있어 어떤 논쟁적인 힘도 갖지 못한다. 결국 작업들은 오직 위계와 합리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굴종의 행위가 된다. 즉, 지역의 관심사와 지역민을 끌어들이는 참여적인 미술 작업 모델의 시도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자본의 힘과 국가에 대한 복종으로 전환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뉴욕과 시카고에서 있었던 1990년대 중반의 “공동체 기반의 미술” 활동이 마주쳤던 모순을 최근 국내 ‘커뮤니티 아트’ 활동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커뮤니티 아트’는 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거나 커뮤니티가 속한 물리적이고 지역적인 공간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 프로젝트들은 공공기관에서 정책적 목표를 가지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경우, ‘지역 주민들이 쉽게 이해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그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예술가들이 대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나아가 이 프로젝트들은 ‘착한예술’이나 ‘재능기부 활동’으로까지 확대되다 보니 예술가의 자발적인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형식으로 끝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공동체 기반의 프로젝트가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접근 또한 매우 상투적인 경우가 허다한데, “공동체 기반의 예술작업”에서 만나는 공동체들은 ‘사회취약계층’,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공장노동자’, ‘재래시장 상인’, ‘노숙자’ 등으로 이름 지어진 공동체들인 경우가 많다.

과연 이 프로젝트에서 대상으로 하는 공동체에 속하기를 기꺼이 원하는 개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최근 한 ‘결혼이민자’들의 워크숍에서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아이들이 참여하기를 수치스러워 한다고 폭로하는 한 결혼이주 여성의 절규를 들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들을 ‘다문화 가정’으로 대상화하고 차별화하고 있는 행위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처럼 공동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지역적, 사회적, 정치적 특수성의 ‘괄호 치기’를 통해 부여된 ‘정체성의 정치’는 흔들리고 유동하는 공동체의 불안정한 토대 안에서 끝없이 해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4. 유동하는 공동체

 

예술은 이러한 공간과 공동체의 전형화에 저항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유동성의 생성과 관련되어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행동주의자 이와사부로 코소Iwa saburo Kohso는 그의 책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에서 어떻게 60년대 후반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행동주의자들이 도시공간을 유동적으로 탈 영토화하였는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소개한다. 탐욕으로 가득 찬 도시 공간들은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끝없이 전형화시키고 파괴한다. 코소는 그의 책에서 건축노동자 출신이었던 고든 마타 클락Gordon Matta Clark의 <건물 자르기Building cuts>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소개했다. 클락은 도시의 건축들이 쓸모없이 버려지는 현장에서 삶을 영위하던 건축 노동자였고 ‘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위한 직접적인 행동’으로서 그가 선택한 것은 <건물 자르기>와 같은 방식의 전위적인 작업이었다.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 권력의 정치적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 저항적인 행동주의가 생산해내는 예술은 도시를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클락의 작업이 브롱크스의 배제된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면, 할렘의 벽면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생겨나 ‘라이팅Writing’ 혹은 ‘에어로졸 아트Aerozol Art’는 철도노동자의 자녀들인 아프로 아메리칸 청소년들이 자율성을 쟁취하기 위하여 도시 내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는 일종의 ‘서명 행위’로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이렇듯 도시와 공동체는 끝없이 동요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이 유동하는 공간과 접속하는 유동적 상상력은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 코소는 “중요한 것은 ‘공간형식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틈 사이로 엿보이는 ‘사회과정의 유토피아’이며, 그것을 목표로 하는 여러 가지 실천들이다”고 말하고 있다. 니꼴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그의 책 『래디컨트』에서 뿌리와 줄기를 동시에 가진 예술가의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탐험의 미학에 기초를 둔 이와 같은 정체성은 여행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그는 “미술가는 현대의 여행자,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의 원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7) 이 방랑자는 불안정한 세계를 방황하고 통제하는 정치 질서를 물컹거리게 만든다.

     

5. 급변하는 도시들

 

2010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박경 예술 감독은 흥미로운 통계를 들어 한국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해서 진단했다. 그는 안양 인구의 25%가 해마다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구가 이동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불안전한 직장 문제, 자녀의 학업 문제와 같은 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무주택 서민의 전세값의 변동과 부동산 시장의 움직임을 따라 끝없이 이동하며 사는 것이 비단 안양 시민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박경 교수는 경희대 건축과 김일현 교수의 말을 빌려 “트랜스–유토피아Trans-utopia”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이동하는 사람들의 유토피아’라는 뜻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안양은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도로와 기찻길, 전철 등 4개의 큰 길들을 안고 있는 대표적인 서울의 위성도시이면서 이동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정지된 공간이다. 이러한 도시에서 과연 지속가능한 공동체 예술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급변하는 도시 환경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사라져서 회복되지 않을 공동체에 대한 강박증과 집착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경 교수가 2000년 디트로이트에서부터 시작한 “가라앉는 도시들the shrinking Cities” 프로젝트는 최근 10년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전 세계 10만 미만의 도시들의 증가 현상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세계화·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면에는 인구를 잃어버린 도시들이 생겨나고 있다. 도시의 인구감소 원인으로는 출산율의 감소, 산업시설 경영업체의 파산, 인근 대형 메트로폴리스의 팽창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도시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마을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예술가들이 나서고 있는 현실은 어불성설이다.

 

6. 예술가와 공동체

 

우리는 앞에서 유동적 공동체 개념에 적합한 예술적 실천이 어떻게 ‘장소 특정적 예술’을 지나서 ‘공동체’와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의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공동체 기반의 예술’로 명명되는 이 사회참여적인 예술 활동들은 예술을 보다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가치에 다가가게 한다. 예술가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공동체의 문제와 더불어 살며 예술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창조하며 완성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예술가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윤리의식은 예술가 스스로 ‘자기 조직화’를 통해서 구축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현장에서 고독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지자체나 지역 문화재단 혹은 지원 단체들의 화석화된 공동체적 사고와 계속해서 충돌하고 있다. 아마도 이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해지면 심해지지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기서 예술가들은 지역의 환경미화를 돕는 일꾼으로 전락하며 지자체들은 자기 정책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예술가들을 활용하고 만다. 이러한 제도들은 관례화되어 공동체들과 접촉하여 새로운 지역사회와 예술을 실험하려는 예술가들을 좌절에 빠뜨리고 대중이 예술의 본질에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게 만든다. 서구사회가 수십 년에 걸쳐서 경험해 온 것들을 압축해서 경험하고 있는 한국사회는 ‘공동체 기반의 예술’에서조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축된 시행착오를 경험하고 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차분한 조망이며 변화무쌍한 공동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다.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하기 위한 예술가들의 열정과 감각을 보살펴야 하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문화재단은 예술가들의 유동적 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레지던시나 여행을 지원하는 ‘예술가의 이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밖으로부터 공동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리’가 유지되는 한 예술은 아직도 공동체 안으로 흘러들어 새로운 쟁점을 생산하고 활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약력
백기영 1969년 강원도 평창 생. 경기문화재단 문예지원팀 수석학예사. 영상미디어 작가로 정원&이주 프로젝트(2002), 생명의 땅 프로젝트(2004), 파프리카 프로젝트(2008) 등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2006년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 디렉터를 거쳐 안산 원곡동에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의 디렉터를 역임. kpeik@daum.net


#주석
1) 프랑크 스텔라의 작업 제작 과정을 두고 도널드 저드(Donald Judd)가 붙여서 불렀던 “하나 다음에 또 하나(One Thing after another)”라는 용어를 연상시키는 이 책 제목은 일반적으로 장소라고 하는 것은 ‘한 장소 다음에 또 한 장소’와 같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해진 원칙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된 체계의 산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이른바 ‘플롭 아트(Plop art)’로 불리는 거대한 모더니즘 예술작품에 대한 반감에서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물에 풍덩하고 떨어지듯(plopped)’ 공공장소에 떨어졌다는 의미로 이런 작품들을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사용된 이 용어는 예술작품이 주변의 물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 전혀 맞지 않고 오로지 작품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3) 권미원, 『장소 특정적 미술』, 김인규, 우정아, 이영욱 역, 현실문화, 2013, 8쪽
4) 같은 책, 39쪽
5) 같은 책, 옮긴이의 해제 중에서 274쪽
6) 같은 책, 171쪽
7) 니꼴라 부리오, 『래디컨트』. 박정애 역, 미진사, 2013, 155쪽

글쓴이 : 백기영
작성일 : 201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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