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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은 불관용자의 대표자인가?
통권 : 53 / 년월 : 2015년 9,10월 / 조회수 : 1789

칼빈은 불관용자의 대표자인가?

 

양신혜

 

John Calvin, 1509-1564

개독교’, ‘불관용자 칼빈’, ‘장로교의 창시자 = 살인자 칼빈

인터넷(2015725일 검색)칼빈을 검색어로 넣어서 얻은 결과였다. 기독교인이자 칼빈이 기초를 놓은 개혁신학을 따르는 장로교의 교인으로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일까?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과 반() 기독교적 색채의 글을 읽으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갖게 되어 오히려 감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공부한 자로서 아쉬운 점은 많은 내용들이 칼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고, 비판이 감정적 차원에서 머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통해 칼빈에 대하여 변론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한국은 불교, 기독교, 천도교, 원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종교적 관용은 시민윤리로서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윤리적 척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201165일 동국대에서 4미터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불상에 빨간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쓴 사건, 같은 해 425일에는 석가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길거리에 달아둔 연등을 훼손한 일, 전주시기독교연합회가 거리연등 설치는 불법이라고 시청에서 시위한 일 등의 기독교인의 불관용적 태도는 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동성애자들의 퀴어 축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대 집회로 인해 또 다른 갈등이 촉발되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 기독교인들의 행위들이 오히려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반() 기독교적 정서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고만 것이다.

 

현재 기독교는 교회 밖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사회적 반감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심한 혼돈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올해 초 CBS를 통해서 방영된 신천지보도는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신천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교회 입구마다 붙여 있는 우리 교회는 신천지의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스티커는 신천지가 교회에 끼친 영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척도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신천지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음을 보게 된다. 신천지에서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동영상들-<칼빈의 마녀사냥 & 현대판 한기총의 강제개종교육>-이 인터넷의 첫 머리(2015511252)를 장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동영상의 주요 내용은 칼빈이 종교개혁 당시에 행한 마녀 사냥이 지금 강제개종목사를 통해서 신천지를 박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가 이단에 빠진 것을 두려워하는 부모에게 자녀를 신천지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목사의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교회 밖과 안의 갈등과 반목은, 필자의 생각으로, 2009년에 극치에 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는 한국교회가 칼빈 탄생을 기념하여 500주년 행사를 준비하던 분주한 시기였다. 바로 그때 밖에서는 살인자 칼빈이라는 비난이 봇물처럼 인터넷과 SNS를 뒤덮었다.

 

하지만 칼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그 당시에 이미 칼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칼빈과 치열하게 예정론 논쟁을 했던 제롬 볼섹(Jerome Bolsec)은 칼빈을 신성모독, 불경, 추문, 저주, 철저한 절망 아래 자신의 삶과 도덕, 사악한 의지와 육체적 죽음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볼섹, 자서전 1577, 140)라고 평가하였다. 칼빈은 이미 그를 반대하는 적대자들에 의해서 이단자로 낙인 찍혔으며, 그들은 칼빈을 폭식가, 간부(姦夫), 매춘녀들의 기둥서방, 동성애자, 수전로라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는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액턴 경과 츠바이크에 의해서 최고점에 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비난의 중심에는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의 화형 사건이 자리한다. 당시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였다.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다니, 이는 참으로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계몽주의의 이후 이성적 합리성에 근거하여 종교적 관용이 사회윤리로 자리를 잡게 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 사건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놀라운 사건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과거의 사건과 지금의 자리의 시대적 간격을 인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사건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해석의 원칙에 따라서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이 벌어진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칼빈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칼빈은 우선, 니콜라 콥이 만성절에 행한 연설을 계기로 프랑수아 1세가 교회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파리를 떠나 망명길에 들어서게 된다. 먼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끌고 있었던 파렐(Farel)의 권유로 제네바에 정착하여 종교개혁을 이끌어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제네바에서 이방인에 불과하였다. 당시 제네바 시의회에서의 기록을 보면, 칼빈이란 이름 대신 그 프랑스인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제네바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이방인으로서 칼빈은 교회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제네바 토착 시민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제네바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후 그가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된 것은 1542년에 이르러서이다. 다시 제네바 시의회의 요청을 받았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라! 그는 자신의 쓰라린 경험을 넘어서 개혁교회의 건설이라는 대의를 위해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1555년까지 제네바의 토착 시민 파랭파와 정치적으로 대립구도에 있었다. 그가 1559년에 가서야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 사실을 기억하라! 칼빈은 교회의 영적 권위와 교리적 순수성을 담보하여 참된 교회의 모습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순수성을 담보하기 위해 종교재판기구인 콘시스토리움(Consistorium)을 세워 영적 권위를 담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네바 토착 민족주의자 파랭파는 자유로운 삶을 규제하는 칼빈의 종교재판기구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로써 칼빈과 제네바의 시의회와는 대립과 반목은 1555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 정치적 대립의 상황에서 세르베투스의 화형이 1553년에 이루어진다. 이 시기는 칼빈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며 독불장군처럼 마음대로 판결을 내릴 처지에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화형의 주범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과한 역사적 해석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엄격한 윤리적 규정과 적용으로 당시의 제네바 시민들을 억압했다고 하는 주장도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해석이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시의회가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 입각한 사회 윤리로 법제화하였다는 사실이다. 시의회가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 따라서 참된 교회와 사회를 만들기로 결단한 후 칼빈을 다시금 초빙한 것이다. 엄격한 윤리규정의 실행은 제네바 사회와의 합의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칼빈은 고문이나 억압,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종교적 개종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종교적 확신은 개인 양심의 결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 작품인 기독교강요초판(1536)에는 이슬람교에 대한 관용의 입장을 취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 비록 교회적 권징에 따라서 출교된 자들과 친근하게 사는 것과 내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혹은 권고로 혹은 교리로, 혹은 자비로 혹은 온유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들로 그들이 회심되어 더욱 좋은 열매를 맺도록 교회의 연합체와 하나됨 안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힘 써야 한다.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투르크인들과 사라센인들 그리고 다양한 종교에 속한 다른 적들도 또한 이와 같이 다루어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을 물과 불, 그리고 일상적인 재료들로 금지한 반면에 또한 그들이 모든 인간적인 일들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을 칼과 무기로 박해할 때, 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신앙으로 강요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들을 유순하게 한 방법들을 승인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칼빈은 이외에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수납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관용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주요교리주변교리’(adiapora)로 나누어 시대적 적용을 위한 해석의 공간을 만들었다. ‘주요교리는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이자 핵심으로 불변의 영원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이 교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걸쳐서 지켜져야 할 교리이다. 이와 달리 주변교리는 상황에 따른 시대적 적용으로서의 해석의 장()을 요구한다. 세르베투스와의 논쟁에서 제기된 삼위일체-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은 하나이다.-라는 교리는 당시 교회의 기반을 형성하는 핵심교리였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 교회가 마르키온1)과 영지주의2)라는 이단에 대항하여 합의한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 기독교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한 것은 단지, 교리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교와 국가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 받은 자가 화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시의 보편적 판례였다.

 

셋째,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은 칼빈 개인의 독단적 결정에 순응한 결과가 아니다. 제네바 시의회의 의원들은 세르베투스의 판결을 두고 고민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세르베투스가 이미 비엔나에서 체포되어 가톨릭교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지 세르베투스를 추방시킴으로 로마가톨릭교회보다 더 관대하게 보이길 원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문제로 화형을 시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왜냐하면 많은 제네바 사람들이 프랑스 가톨릭 도시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 시의회의 망설임은 이해할 만하다. 그래서 스위스의 시의회는 세르베투스에게 비엔나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를 거절하자 제네바 시의회는 다른 도시의 정부로부터 지지가 필요하였다. 물론 세르베투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네바 시의회는 주변의 비난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작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스위스의 개혁교회들은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에 동조하였다.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51)의 뒤를 이어 취리히교회를 이끌어 간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다소 관용적 입장을 취했던 루터의 후계자인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도 세르베투스의 화형은 정당하게이루어졌다고 표명하였다. 칼빈과 예정론 논쟁으로 대립 갈등 구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칼빈의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볼섹도 나는 그런 괴문 같은 이단자의 죽음을 기쁘게 생각하며 이 글을 기록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악하며 사람 가운데 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세르베투스 자신도 이전에 칼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완고하고 사악한 이단은 화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자는 화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시의 공적인 규범이였고 지배적인 정서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회가 세르베투스에게 화형을 선고하였을 때, 그는 화형보다는 덜 참혹한 방법인 참수형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인도적 차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칼빈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주요교리인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이단을 처벌하여 교리의 순수성을 담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결단을 중시하였고, 인도적 차원에서 화형보다는 덜한 참수형을 권고함으로써 근대사회로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으로 인한 현대의 칼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우리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임의적 해석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과 사료에 대한 정확한 인지가 필요하다. 만약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는 임의적인 비난으로 흐르기 쉽다. 그리고 감정적 차원에서의 임의적 비난이 난무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자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여 교회의 언어가 사회적 방언으로 머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에 대한 반대하는 그룹 또한 감정적 차원에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기보다는 기독교의 본질에 귀를 기울이는 성숙한 시민의 자세 또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1) 마르키온은 하나님을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으로 구분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과 보복의 하나님인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으로 높이 경외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여 신약만을 높이 평가한다.

2) 영지주의자들은 참된 지식인 그노시스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조를 지닌다.




#저자 약력
양신혜(楊信惠) 1970년 충남 논산 생. 대신대학교 조교수.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등. glaubeyang@hanmail.net
글쓴이 : 양신혜
작성일 : 201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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