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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과 여성 혐오
통권 : 53 / 년월 : 2015년 9,10월 / 조회수 : 2359

음악과 여성 혐오

 

최유준

 

 

모자열람실의 추억

 

직장에 나가는 아내를 대신해 낮 시간 동안 딸아이들의 육아를 도맡다시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 손을 잡고 집에서 가까운 시립도서관에 자주 들렀는데, 1층에 모자(母子)열람실이라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엄마와 아들이 아닌 아빠와 딸이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말리지는 않았지만 매번 거슬렸다. ‘그러니까 도서관은 엄마라는 양육자가 아들이라는 미래의 인재를 키우는 곳이라는 뜻이렷다!’ 내 손을 잡은 어린 딸이야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혼자서 투덜거리며 실제로 아빠들보다 엄마들이 훨씬 많은(물론 딸들도 많아서 인구학적으로는 모녀열람실이 가장 정확한 명칭이었을 듯) 그곳으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남성도 사회적 약자의 처지가 되면 사회적 성역할의 구분이 억압적이라는 것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 삐끗하면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미칠 수 있다. ‘<>녀열람실이나 <>자열람실이 아니고 <>자열람실이냐구?’ 이 억울함의 토로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점입가경 모자열람실은 도서관에서 아빠들을 몰아내기 위한 엄마들의 담합과 모략에 의한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그 피해망상은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 하겠다.

 

권력자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며, 이름 불러지는 자가 아니라 부르는 자에게 권력이 있는 법이다. 요컨대 모자열람실()’는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기 때문에 거기 호명되어 있는 것이다. 마을 도서관에서의 사소한 기억을 다소 장황하게 새기는 이유는 최근 이슈가 된 여성 혐오 현상을 비유적으로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예컨대 김치녀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는 도서관의 ‘<>자열람실에 들어가 왜 여기가 ‘<>자열람실이 아니냐면서 그곳에 있는 애꿎은 엄마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어느 비루한 아빠의 모습으로 비유할 만하다. 이 아빠의 분노는 말할 수 없이 비합리적이지만, 성 해방의 관점에서 일말의 긍정적 계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분노는 어쨌거나 양성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인과 유색인

 

서양인을 인종적으로 가리키는 백인(白人)’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 white)’이라는 말이 과연 그들의 피부색을 가리키는 수식어일까? 사실상 하얀 피부로만 말하자면 동아시아인들도 서양인 못지않다. 서양인들의 외모상의 특징은 피부색보다는 눈이 들어가거나 콧대가 우뚝 서있는 등의 안면골상의 차이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서양인의 피부는 오히려 울긋불긋하기도 하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사람들의 경우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도 많다.

 

요컨대 백인이라는 말은 인종정치(racial politics)의 맥락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하얀 피부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무색(無色)의 사람’, 곧 아무 색도 없는 사람이다. ‘무색인으로서의 백인은 누군가로부터 색이 칠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색을 칠하는 사람, 인종주의적 착색행위의 주체를 가리킨다. 결국 백인에 의해 색칠된 사람들이 유색인(colored people)’이다. 따라서 한국인은 아무리 하얀 피부를 가졌더라도 노란색의 유색인으로 분류된다. 인종차별은 근본적으로 백인들에 의해서만 자행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종에 관한 한 무색의 그들만이 차별에 대한 권력을 가진 주체이기 때문이다.

 

서양과 그 나머지(the West and the Rest)’라는 제국주의적 권력구도가 백인과 유색인이라는 인종적 이분법에서도 똑같이 작동하는 셈인데,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또 다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정치의 맥락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차별의 전 지구적 위계가 형성되는데, 최상위층에 서양-백인-남성이 놓이며 최하 그룹에 비서양-유색인-남성비서양-유색인-여성이 놓인다. 그 최하 그룹에서 한국 남성한국 여성을 차별하는 모습은 사실 좀 보기 딱하다. 한국 남성들은 전 지구적 관점에서 자신의 타자성을 자각하고 한국 여성들과의 연대를 모색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온음계와 반음계

 

근대 이후 서양 음악(*이 글에서 서양 음악서양 근대 음악’, 서양 클래식 음악을 가리킨다.) 안에서도 인종차별의 여러 함의가 재현되어 왔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기본 C장조를 기준으로 할 때 흰색 건반으로 연주되는 도레미파솔라시7음계(온음계) 음들이 흰색 혹은 무색의 음들이라면 검은 건반으로 연주되는 반음계 음들은 유색의음들이다. 반음계를 뜻하는 영어 크로매틱(chromatic)’도 어원상 색깔이 있는이라는 뜻이다. 한편, 악보 상에서 온음계 음들은 자연스러운’(natural) 음으로 간주된다. 반면 반음계의 크로매틱음들은 날카롭거나(sharp) 맥 빠진(flat), 곧 자연스럽지 않은 음들이다. 요컨대 반음계 음들은 비정상적인 유색의 음들인 셈이다.

 

이제 안정된 온음계는 남성을, 불안정한 반음계는 여성을 표상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오페라 <카르멘>에서 집시 여주인공 카르멘의 유명한 아리아 사랑은 길들지 않는 새(L’amour est un oiseau rebelle)’의 선율은 반음계를 타고 미끄러져 내린다. 반면에 남성적인 투우사의 노래에서 주제 선율은 안정된 온음계로 구성된다. 여기서 반음계-불안정성-여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음악적 연상작용이 인종적 타자성(집시)과 결합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의 문제는 다시금 인종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다.

 

블루스나 재즈에서 자주 쓰이는 반음계적 음들을 블루노트(blue note)’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블루라는 말에 원래 우울하다라는 뜻이 있기는 했지만, 서양인들이 하필 이런 음들을 우울하거나 슬프다고 느꼈던 이유는 달리 찾을 수 없다. 단지 그 음들이 자신들의 관습적이고 안정된 온음계로부터 벗어나 있는 불안정한 음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블루노트 역시 그들에게는 유색의 음들인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백인 청중들을 고려한 클래식 블루스가 양식화될 때 메이미 스미스(Mamie Smith)나 베시 스미스(Bessie Smith) 같은 흑인 여성 가수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던 데에는 여성과 인종적 타자성을 결합하여 대중의 센티멘털리즘을 최대한 자극하려는 음악 산업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Bessiesmith

 

 

낭만주의 오페라의 여성 수난

 

서양음악은 그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곳에서 권력을 발휘해 왔다. 예컨대 한국 전통음악은 국악으로, 블루노트를 쓰는 재즈나 블루스, 록음악은 대중음악으로 특정하여 불려온 반면 서양음악은 그냥 음악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음악의 이해라는 말은 사실상 서양음악의 이해를 뜻했다. 이렇듯 보편적 권력(부르주아 권력)이 갖는 익명성을 가리켜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탈 명명화(exnomination)’라고 불렀다. 그것은 타자를 호명하되 그 자신은 호명되지 않는 권력의 성격을 뜻한다.

 

앞서 거론한 모자열람실의 사례를 다시 떠올려보면, 그러한 탈 명명화의 권력이 남성(아빠)과 여성(엄마) 가운데 어느 쪽에 있는지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남성 권력은 여성을 타자로서 호명할 뿐 스스로를 호명하지는 않는다. 여자 교수는 여교수’, 여자 가수는 여가수지만, 남자 교수와 남자 가수는 그냥 교수이며 가수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그렇듯 호명되는타자가 호명하는권력을 위협하거나 심지어 전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양 근대음악의 성립기인 18세기 고전주의 시대에만 해도 불안정한 반음계 음들은 안정적인 온음계에 철저하리만큼 종속되었다. 반음계 음들은 일시적 일탈로 나타났을 뿐 반드시 온음계로 해결되어야 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낭만주의 시대로 돌입하면서 음악의 젠더정치는 본격화되는 동시에 붕괴되어 갔다. 일탈의 매력을 주는 반음계의 사용이 빈번해지면서 동시에 온음계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낭만주의 오페라 무대에서 매력적인 반음계는 집시 카르멘으로 대표되는 요부(妖婦, 팜므파탈)’, 그리고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성적(性的) 긴장으로 표상되었다. 당시의 부르주아 남성 권력은 오페라의 위선적 청중으로서 이들 요부의 아슬아슬한 반음계적 곡예를 성적 충동과 함께 즐기다가 마지막에는 요부살해를 통해서 도덕적 면죄부를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카르멘>만이 아니라 <라트라비아타><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라보엠><나비부인>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기 오페라 속 여주인공들이 무대 위에서 죽고 또 죽었다. 폐렴에 걸려 죽고, 칼 맞아 죽고, 스스로 할복하여 죽고.

Maria_Callas_(La_Traviata)

 

아마도 서양의 전통 있는 오페라 극장에는 죽은 여주인공들의 원귀(寃鬼)가 서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희생이 밀알이 되어 거둔 민주적 성과라고 말하면 지나친 언사가 되겠지만, 20세기 이후 서양의 현대음악은 온음계보다 반음계가 지배적인 음악으로 바뀌었다. 타자의 예술적 재현은 이렇듯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타자의 재현은 주류질서와 남성 권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내파(內破)하는 계기도 아울러 갖는 것이다. 물론 음악회 청중들이 여전히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에 탐닉하느라 현대음악을 잘 안 듣는 데서 보이듯, 남성적 주류질서의 전복이란 현실에서는 여전히 먼 이야기 같지만 말이다.

 

 

대중음악과 여성 혐오

 

앞서 블루스와 재즈 양식의 토대를 이루는 블루노트의 타자성을 예로 들었듯이 대중음악은 애초에 서양음악의 타자로서 여성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중음악에서 남성 우월주의가 본격적으로 표현된 것은 블루스를 백인 음악으로 전유한 록음악이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크게 넓히고 이후로 미학적 정당성까지 얻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주류의 부르주아 남성 권력이 비주류의 하위문화에까지 스며들게 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0세기말에 양식화된 힙합 음악 장르에서 일부 욕설이나 디스문화가 있다는 이유로 흑인 음악이나 대중음악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여성 혐오가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라틴 댄스음악을 비롯, 전통 민속춤에 기반한 댄스음악의 경우 특히 춤 연행(performance)의 맥락에서 관습적으로 젠더 구분이 명확하고 남성의 주도가 분명하여 남성우월주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대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세심한 배려가 전제되어 있어 그러한 남성우월주의가 여성혐오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찾기란 어렵다. 요컨대 대중음악은 본질상 타자들 사이의 교감과 연대를 표상하는 음악으로 약자 혐오와는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다.

 

최근 한국의 케이블 TV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4”에서도 일부 참가자의 여성혐오 표현으로 물의를 빚었지만, 그 역시 대중음악의 본질과 관련되기보다는 오히려 서양 낭만주의 오페라극장과 맥이 닿아 있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일 뿐이다. 자유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품성을 높이기 위한 자극(특히 성적 자극)에 몰두하는 남성 음악가가 선택할 수 있는 궁극의 해답은 무엇일까? 적어도 그 해답 가운데 한 가지는 무의식적이나마 요부 살해의 유서 깊은 낭만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일이 될 것이다.

 

연전에 발라드 가수 브로가 발표한 <그런 남자>라는 노래도 여성 혐오적 가사로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그 노래의 인기 요인은 남성의 입장에서 느끼는 통쾌함에 있었다기보다는 무의미를 향해 돌진하는 애처로운 감정 표현의 과장된 상투성과, 그로부터 유발되는 해학과 웃음의 코드에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애절한 발라드 선율과 창법으로 이른바 김치녀를 질타하는 모습은 같은 남자 입장에서 통쾌하기는커녕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상품화된 연애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남성의 비애감 같은 것이 표현된 그 노랫말은 여성 혐오라기보다는 오히려 자학 개그에 가까웠다. 그것은 또한 무한경쟁의 인정받기 힘든 음악시장에서 튀어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 뮤지션의 처절한 자기고백처럼 들리기도 했다.

 

 

초콜렛 복근의 역설

 

어느덧 불혹의 나이를 훌쩍 지나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보니 세상사의 변곡점들이 조금씩 읽히곤 한다. 그 변곡점들 가운데 하나는 남자들의 초콜릿 복근이 여성들에 의해 회자되기 시작하던 때,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른바 훈남청년들이 여성 출연자들 앞에서 쑥스러운 듯 왕()자가 새겨진 자신의 배꼽을 열어 보여주고 그걸 보는 여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부터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그 즈음부터 나잇살과 함께 내 배는 차오르기 시작했고 거리를 거닐면서 타인의 시선과 살진 내 모습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시선의 권력을 느꼈다. 여성들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시달려왔던 그 권력, 남성이었기에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권력을 말이다. 중요한 점은, 그 권력이 여전히 여성의 권력이 아니라 부르주아 남성 권력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헬스클럽에서 비지땀을 흘리는 남성들이 자신의 초콜릿 복근을 내보이며 자기증명을 해야만 하는 궁극의 대상은 여성이 아니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면 성실 철저한 자기 관리 능력과 함께 여성을 향한 상품성까지 겸비하고 있음을 어필해야 하는 그 대상은 여전히 여성이 아닌 것이다.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다수까지 타자화된다. 이른바 김치녀에 대한 비난 등 여성 혐오 현상의 배경에 무한경쟁 사회, ‘남성도 약자가 되어가는 현실이 있다는 최근 ‘PD수첩의 진단은 그 자체로는 옳았다. 다만 ‘PD수첩의 제작진은 (서두의 비유를 다시 들자면) ‘모자열람실에서 행패를 부리는 아빠들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기보다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식의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반복컨대 남성도 사회적 약자의 처지가 되면 사회적 성역할의 구분이 억압적이라는 것을 느끼기 마련이다. 최근 여성 혐오의 언사들은 이 막연한 느낌이 성찰의 단계를 거치지 못한 채 그 분노의 표적을 잘못 겨눈 채 내뱉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초콜릿 복근이 여성해방과는 무관하게 시선의 권력에 대한 총체적 이해의 계기를 내게 만들어 주었듯이, 최근의 여성혐오의 표현들과 음악 또한 젠더정치와는 무관하게 이 사회의 약자들과 타자들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를 나는 바란다. 내가 남성이라서 너무 희망적으로 보는 걸까? 아니, 내가 사는 21세기의 사회가 그래도 오페라 무대에서 여주인공들이 비명에 죽어가던 19세기 가부장적 부르주아 사회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 믿고 싶어서다.

 

 

 




#저자 약력
최유준(崔裕峻), 1969년 부산 생. 음악평론가. 전남대학교 감성인문학연구단 HK교수. 최근 저서로 『대중의 음악과 공감의 그늘』, 『음악문화와 감성정치』 등. hoggenug@naver.com
글쓴이 : 최유준
작성일 : 201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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