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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스 사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
통권 : 53 / 년월 : 2015년 9,10월 / 조회수 : 1470

메르스 사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

 

황규관

 

aljazeera

지난 번 메르스 사태 때 내게 가장 의미심장했던 에피소드는,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과장이란 사람의 국회 답변 내용, 아니 답변 자세였다. 그는 메르스가 확산되는 데 대한 삼성서울병원 측의 이해 못할 대응을 지적하는 박혜자 의원의 질의에 우리 병원이 아니라 국가 뚫린 것이라고 답변했다. 재차 물어도 그는 병원의 잘못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추후 여론은 좋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당당함이었는데 과연 그것이 의사라는 전문가적 소명의식 속에서 나온 것이었는지는 의견이 엇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에 감염된 삼성서울병원 의사가 다중이 모인 장소의 회합에 참석했다고 발표하자 해당 의사는 박원순 시장에게 정치적인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여론은 삼성의 오만을 질타했지만 병원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이라는 감염내과 과장의 발언은 사실 여러 겹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중요도나 우선순위와 상관없이 그것을 꼽아보자면, 첫째로는 이미 대한민국의 의료체계는 자본의 손아귀에 장악돼 있다는 점이다. 먼저 삼성서울병원이 2차 감염지의 구심점으로 떠올랐음에도 정부가 전혀 손을 쓰지 않은 점을 구체적인 예로 우리는 들 수 있다. 또 국립중앙의료원을 메르스 거점병원으로 정부가 뒤늦게 지정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다른 질환으로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저소득층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떠올려야 한다. 정부는 삼성서울병원에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삼성서울병원의 이윤은 애써 지키려고 했으나 반대로 국립병원을 이용하는 가난한 국민을 아무 대책도 없이 방치하다시피 했다. 가난한 국민은 결국 자본의 이윤 축적을 위해서는 사전이든 사후든 고려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이만한 상징이 또 있을까 싶다.

 

두 번째로는 의료자본(에 종사하는 사람)의 입으로 국가의료체계가 조롱당한 점이다. 이는 이미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병·의원의 시장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단순히 일개 대형병원 과장의 생각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메르스가 확산되는 데 있어서 공공의료체계가 전혀 손을 쓰지 못한 저간의 사정과 연결시켜 봤을 때 조금 더 명확해진다.

 

언론은 박근혜 정부가 골든타임을 놓친 무능을 탓했지만, 사실은 정부의 무능도 무능이거니와 이미 무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작년 봄 맹골수로에서 벌어진 엄청난 일 앞에서 해경이 언딘이라는 일개 구조업체에게 절절 매던 모습과 겹치지 않는가?

 

세 번째로는 긴급한 의료사태가 벌어지고 사태 수습이 엉망이 될 때는 그 원인을 의료자본에 돌려서는 안 된다는, 그러니까 대형병원 의사의 입에서 원치 않게 발설된 리얼리즘의 승리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대형병원들은 사회의 긴급한 의료사태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의료자본의 목적은 오로지 이윤의 축적에 있으니까. (여기서 몇 해 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미래 성장동력은 생명산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음이 생각난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의료체계는 3단계의 의료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아는 동네의 의원이나 보건소가 1차 의료기관이다. 여기에서 받은 질환에 따라 2, 3차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1차 의료기관으로 개인병원을 찾으며 2, 3차로 올라갈수록 병원의 사이즈와 그에 대한 의존도는 비례한다. 혹자들은 병·의원이 민영이긴 하지만 건강보험이라는 공공시스템이 있으니 의료의 공공성은 보장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것은 국가에서 관리 가능한 질병에 대해서만 그렇다는 게 이번 메르스 사태로 밝혀졌다.

 

지금은 양태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지역의 보건상태에 따라 전염병을 앓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싸드나 홍콩독감, 메르스처럼 국외에서, 그러니까 토속적이지 않은 바이러스가 유입되는 형국으로 바뀐 듯하다. 내가 감히 그 분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겠지만, 생명체의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의 흐름도 함께 한다는 것은 이제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특히 토양이나 생활습관의 차이 정도가 다르면 다를수록 혹은 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바이러스일수록 부정적인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은 높다. 이종감염 같은 경우는 인간의 몸이 아무런 대비를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맞은 정부나 의료기관들이 갈팡질팡했던 것에는 이런 점도 한몫 거들었을 게 분명하다.

 

바이러스나 세균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가 취급하지 않아서 그렇지 생명체의 변이에 바이러스나 세균의 간섭, 즉 인류와 그것들 간의 유기적 결합관계가 크게 작용했다는 과학적 연구 성과도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겪는 이러한 사태도 그러한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태는 당대의 삶을 크게 위협한다. 일부 진화학자들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종적 차이를 가로지르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그 오래된 일례로 우리의 세포질 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를 들 수 있다.

 

물론 하나의 개체를 파괴하는 관계는 나쁜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당대의 삶은 기나긴 생명의 역사에서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바이러스나 세균으로 인한 질병을 허무주의적으로 받아들이게만 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이성적 대처를 가능케도 한다. 이번 메르스 사태 때 내가 본 것은 이성이 사라진 공포의 맨얼굴이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희망과 함께 공포의 정서는 인식의 결핍과 정신의 무능력을 지시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이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하기를 애쓰면 애쓸수록 () 공포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하도록 () 더욱 더 노력한다고 썼다.(4부 인간의 예속 또는 정서의 힘에 대하여정리 47의 주석)

 

그런데 이성의 실종은 국가나 공동체의 책임 방기가 불러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문명장치는 인간이 홀로 자연 상태에 맞설 수 없는 한계를 나름 넘어서기 위한 고육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개체의 능력끼리 연합함으로써 그 능력을 극대화시키려고 우리는 국가든 공동체든 이룬다. 이 지점에서 국가의 보호가 나태와 권태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주장은 대한민국에서는 경험한 바가 아직 없는 관계로 진지하게 거론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점이 있다.

 

아무튼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기능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인 공동체의 원리이며 국민이 국가라는 일종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실존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가가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국가가 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곧바로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정에게 전가되었고, 가정의 가장은 자신의 가족을 보호, 부양하기 위해 노예적인 삶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태의 지속 앞에서 개인이 이성적이길 바라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일이다. 현실 속에서 국가는 국민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좋은 제도를 만들어 왔지만 기실 우리가 국가를 이루고 국민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암묵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미 고인이 된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의료정책을 혁신한 인물인 것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는 우방인 쿠바의 도움을 받아 마을 안으로라는 뜻을 가진 바리오 아덴트로 사업을 단행했다. 베네수엘라에서 바리오’(bario)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동자계급이 모여 사는 마을을 부르는 말이다. 처음에 베네수엘라 혁명정부는 의사들에게 이 사업에 자발적 참여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응답은 매우 미미하여 50명만 참여하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참여한 의사는 29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쿠바 의사의 도움을 받아 바리오 아덴트로 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마을 단위로 마을건강위원회를 꾸려 1,500명에서 2,000명이 거주하는 마을마다 의사 10~20명을 배치했다. 마을건강위원회는 자발적으로 의사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환경을 제공했고 바리오 아덴트로 사업은 점점 더 확장되고 개선되었다. 거기에다 쿠바 아바나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 유학 보냈던 의학도들이 졸업 후 자벌적으로 귀환해 자원봉사단체를 결의하면서 그 사업은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의 열정과 결의를 밑천 삼아 베네수엘라 정부는 담장 없는 대학교의 일종인 지역 통합 의학교라는 개념을 도입한 점이다.

 

이 지역 통합 의학교에서는 쿠바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이론과 임상 실습을 병행했는데 특징적인 것은 지역에 기반한 의료교육이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쿠바의 의료교육 시스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평가받았으며 도리어 교수진인 쿠바 의사들이 베네수엘라의 지역 통합 의료교육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들을 더 갱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창조적인 결과였다. 국제적으로 뛰어난 쿠바 의사들은 교육자로서의 역량도 추가하게 된 것이다.

지역 통합 의학교를 가능케 한 기본 구상인 미션 수크레, 즉 담장 없는 대학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수도인 카라카스에 갈 이유가 사라진 것도 있지만 학생들이 연구 주제로 삼는 문제 중에는 지역사회의 보건의료와 관계된 게 적잖았다는 것이다.(자세한 것은 검둥소에서 펴낸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참조)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건 상황이 토속적 질병보다 문명적 질병이나 국외에서 유입되는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한 형국으로 바뀐 듯한 것도 사실이지만, 의료지식이 없는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지역 기반 의료시스템은 외부 질병의 차단효과도 가져오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 이상의 언급은 내 개인의 역량을 훌쩍 뛰어넘는 일이니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자제해야겠지만 지역적 특색에 맞는 공공의료시스템의 구축은 글로벌한 환경에 대한 어떤 방어벽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이번 메르스 사태는 지역적 방어벽이 무너진 결과에서 비롯된 측면도 크다. 최초 감염자는 2차 의료기관으로 가서 바이러스를 퍼뜨렸고 다시 다른 감염자는 3차 의료기관으로 가서 감염 속도를 배가시켰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의료체계의 붕괴는, 그것이 꼭 의료체계뿐만이 아니라 사회문화 전체적으로 비정상적인 집중화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허약해진다.

 

비유를 들자면 일종의 센터가 무너지니까 집단적인 아노미 상태가 발생한 것으로 내게는 보였다. 그런데 이 센터, 즉 중앙으로 동일화시키려는 욕망은 국가나 자본의 속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세계는 하나라는 중앙집중화에 대한 역발상인 지역적 특색의 강화는 공공의료 정책에서도 필요한 듯 보인다. 베네수엘라가 차베스 사후 바리오 아덴트로 사업을 얼마나 심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모델이 아니라 혁신을 택한 그들의 의지와 이성이다.

 

베네수엘라 의료개혁정책의 특징은 의과대학이 대도시에 몰리지 않고 각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혹자들은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특징이나 베네수엘라 의료기기의 수준을 지적하며 대한민국 대형병원의 그것과 비교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메르스 사태 때도 대한민국의 의료 수준 운운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당연히 나도 베네수엘라 의료기기의 수준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의료기기의 수준이 곧 의료체계와 임상 실력의 수준을 곧바로 의미하는지도 말 모르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과잉 발달된 현대의료기술에 대한 이반 일리치의 통찰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현대의료기술은 인간의 신체를 고통으로부터 완벽히 해방시킬 수 있다는 조작된 신화에 근거해 있으며 자본은 그 신화를 확대 유포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로 현대의 인간은 현대의료기술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가축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가축은 울타리가 무너지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우리가 이번 메르스 사태를 통해 경험한 것은 국민이 위임한 기능을 국가가 자본에게 팔아치웠다는 사실이며 삼성서울병원은 이미 사유화된 의료체계를 밑받침 삼아 오만을 부렸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능해진 것은 단순히 현 정부가 아니라 공공의료체계이며 심하게 말해 공공의료체계의 부재 상태를 우리는 심각하게 경험한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개인에게 이성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국가가 어서 빨리 이성을 되찾는 게 순서상 맞다.

이성은 기계적 합리성과 알고리즘적 사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겪은 사건과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실험과 우리의 현실을 종합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은 물질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위엄을 회복하고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만이, 메르스 사태 속에서 은폐된 미군 부대의 탄저균 반입 문제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저자 약력
황규관(黃圭官), 1968년 전주 출생. 시인, 《삶이 보이는 창》 편집인
전태일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정오가 온다』(삶창),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실천문학사), 『패배는 나의 힘』(창비) 등. grleaf@hanmail.net
글쓴이 : 황규관
작성일 : 201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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