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을 경계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책의 종말’을 이야기했다. 말이야 이전부터 있었으나, 거기에 힘이 실리고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부터였다. 2000년대 초반 전자책 전용 단말기가 상용화되면서, 디지털출판물 시장의 형성이 본격화된 까닭이다. 다급하게 산업의 규모를 확장하고, 분주하게 이론이 도출하며, 황급하게 전략을 수립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종말은 당연시되었다. 

 여기에 유념할 부분이 있다. 종말을 입에 담는 이들 중 대부분은 사기꾼이라는 사실. 그들은 도래하지 않는 일을 판매하여 이익을 추구한다. 그들의 주장은 애당초 증명이 불가능하다. 단지 불안을 자극하여 소비자를 충동하고, 확인할 수 없는 결과물로 책임을 회비해버릴 뿐.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믿고, 그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도 믿음을 강요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지만, 그런 까닭에 훨씬 위험하다. 그러니 종말을 받아들이기 전에 우선 의심할 필요가 있다. 진위 판단이 어렵다면, 종말을 입에 담음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이들은 없는지도 가늠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책의 종말에 대한 주장도 검토해야 한다. 우선 부정확한 표현이 문제가 된다. 그들의 주장에서 ‘책’은 종이인쇄를 바탕으로 제작되는 출판물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책의 종말이란, 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표현매체가 바뀐다는 뜻이 된다. 요컨대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종말’이란 과장이고, 그보다는 ‘변화’라는 표현이 타당하다. 이처럼 호들갑을 걷어내고 살펴보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는 그리 낯설지 않다. 죽간(竹簡), 파피루스, 양피지 등등 책의 내용을 담았던 매체는 꾸준히 바뀌어왔고,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디지털 미디어의 대두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동안의 변화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록, 저장, 휴대의 편리를 추구하는 활동이므로.

  다음으로 검토할 부분은 종이책의 종말 혹은 디지털 미디어로의 변화를 통한 이득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여부다. 당연히 디지털 미디어콘텐츠의 제작, 유통, 송수신 관련 기기와 프로그램 공급자가 직접적인 이익당사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야말로 종말론의 배후로 지목할 수 있겠다. 사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일은 낯설지 않다. 지난 세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라디오와 TV도 역시 세계대전 직후 쓸모가 줄어든 무선통신장치를 판매하려는 목적에서 보급되지 않았던가. ‘책의 종말’이란 주장 역시 다르지 않다. 디지털 미디어의 시장을 확장하려는 마케팅 활동이자, 기존 인쇄출판 산업과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에서라면 분명히 그러하다.

  문제는 책의 매체 변환이 심리적으로 상당한 저항감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이는 뉴스, 예능, 드라마, 음악 등이 방송매체에 손쉽게 규합되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만큼 ‘책’에는 복잡한 의미망이 내포되어 있다는 증거인데, 그 의미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책은 오랜 세월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뉴스도 정보를 전달하지만, 그 깊이와 체계에서 책을 따라잡기 어렵다. 책은 오랫동안 감성적 쾌감을 유발하는 도구로 작용했다. 예능과 드라마도 같은 작용을 하지만, 예능은 즐거움에 집중하여 쾌감의 의미가 협소하고, 드라마는 감성을 자극하지만 그것이 깊은 성찰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책과 다르다. 또한 책은 공감과 소통의 매개체였다. 이 점에서는 음악 역시 비등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음악은 본질적으로 향유를 기반으로 하는 데 반해,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달은 보다 내밀하다.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Paul Auster)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책은 고독의 이미지”를 갖는다. 같은 맥락에서 독서 역시 기본적으로 고독한 활동이다. 그러나 그를 통해 우리는 위무를 받고, 세상을 읽고, 사람들과 교류한다. 또한 독서는 본질적으로 멀티미디어적 활동이다. 우리는 눈으로 읽고, 낭송하면서 타인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게다가 만진다. 손끝으로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두툼한 책등을 어루만지며, 느낀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와 감정을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존재는, 책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이미 책과의 교감을 경험한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다.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디지털 미디어가 발전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이 종이책을 통해 느꼈던 감각을 기억하는 동안만큼은, 분명히. 다만 예감을 떨쳐내기는 어렵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감성보다 효율을 선택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는 조금씩 더 많은 부분을 디지털 미디어에 내어주게 되리라는 것을. 인간의 삶은 대체로 불편한 감성보다 편리한 합리를 추구하여 왔으므로.

 그러나 변화는 시작되었다
 
  선택의 폭은 넓지 않다. 변화를 거스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속도를 조정하고 대비하는 정도에 불과하리라.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 디지털 미디어로의 전환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껏 과열된 양상을 진정시켜 논의를 본류로 되돌리고, 그를 통해 옛 것의 장점은 나누고 새 것의 편리는 공유하는 노력만큼은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검토할 부분은 지금까지의 논의가 “주로 하드웨어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와 산업적 측면에 집중되었다”1)는 사실이다. 물론 디지털 미디어 관련 산업에서 기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산업 자체가 기술을 기반으로 구축되었고, 개발된 기술은 거의 즉각적으로 실무에 반영되며, 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표현의 확장으로 이어져 새로운 영역 창출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초창기 전자책은 이미 출간된 도서들을 디지털파일로 전환시켜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종이책과 변별되는 부분이 적고, 예술성․가독성(可讀性)․활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을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로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메모, 책갈피, 편집, 검색, 보관방식 등등의 편의기능이 강화되면서 활용성만큼은 종이책을 능가했다고 판단된다. 가독성 역시 향상되었다. 이는 단지 편집디자인의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이퍼링크, 슬라이드, 플래시, 동영상 등등의 디지털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표현영역이 확장된 결과다. 남은 부분은 예술성인데, 이 부분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겠다. 뭐라 해도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기간은 이제 겨우 아기가 성인이 될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니까.

  기술적 측면에서는 저작도구(tool)의 발전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작가 개념의 확장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출판은 진입장벽이 낮다. 공인된 등단절차를 거친 작가에게만 집필 자격을 부여하지 않고, 일정한 저술능력을 갖추었다면 누구라도 출판에 참여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작가가 늘면 자연스레 출판시장의 다양성도 확대되니, 독자들의 여러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유리하며, 결과적으로 출판시장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리라는 전망도 가능하다.

  다만 양적(量的) 팽창이 질적 성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인터넷소설’이다. 이는 사용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창작과 유통이 이루어지는데, 그만큼 창작활동 참가자도 많고 작품의 수도 다양하다. 인지도 향상이 용이하고, 전파 속도가 빠르며, 히트작의 경우 다른 매체로의 전환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수준의 차이가 크다는 한계가 있다. 독창적인 작품이 배출되고, 그중에는 문화콘텐츠산업의 측면에서 가치가 높은 케이스도 적지 않지만, 그 몇 배로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한 아류작(亞流作)이 양산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사실 이런 양상은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종이로 책을 만들었을 때에도, 혹은 그 이전에도, 작품마다 수준 차이는 분명했고, 유사한 작품들은 있었다. 다만 콘텐츠의 수량이 늘어난 만큼 그 차이와 유사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뿐이다.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
 
  그동안 출판 산업은 디지털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해왔다. 그러나 콘텐츠 개발과 관련된 시도는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기술이 적용되더라도 출판은 본질적으로 책을 만드는 일이며, 그러므로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책’이라는 콘텐츠 그 자체에 있다. 제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 반영되더라도 책을 통해서 정체성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가치를 확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디지털 출판과 관련된 앞으로의 논의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분야는 콘텐츠 개발과 기획이 될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전자책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를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현재 전자책 시장에서 인기 있는 부문은 장르소설, 만화, 어린이, 어학, 실용 등인데,2) 이는 각각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장르소설과 만화는 엔터테인먼트로 기능한다. 전자책은 종이책보다 집중도가 떨어지므로 상대적으로 오락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 주목받기 쉽다. 만화와 어린이는 시각적 효과의 활용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매체의 특성에 부합된다. 어학과 실용은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전자책은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최신 기술의 전달이 용이하고, 멀티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가시화(可視化)하므로 효율적인 전달이 가능하다. 결국 이들 분야는 디지털 미디어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에 비해서 전문지식이나 문학 분야는 전자책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를 근거로 전자책에는 연성(軟性) 콘텐츠만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는 명백한 편견이다. 그보다는 해당 분야에서 디지털 미디어의 특징이 드러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타당할 것이다.

  적어도 전문지식 분야에는 이런 문제가 점차 해결되는 중이다. 이 역시 기술 발전의 영향이다. 디지털 저작도구가 개선되면서 지도․통계․정책 자료 등등의 오픈소스 및 공공데이터가 텍스트와 직접 연동되고,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정보의 전달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전자책의 구현이 전용 단말기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폐쇄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웹(web) 기반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개방적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등을 비롯한 정보 다각화의 창구가 마련된 까닭이다.

  그에 반해 문학 분야는 여전히 디지털 미디어가 적용될 여지가 적다. 시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블로그에 연재된 소설들, SNS를 통한 독자와의 소통, 배경음악과 관련 이미지 삽입 등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블로그 연재소설 박범신의 󰡔촐라체󰡕, 트위터 독자들이 선발한 글을 모은 이외수의 󰡔아불류 시불류(我不流 時不流)󰡕, 블로그 연재 과정에서 주제곡과 삽화를 함께 게시한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 중에서 직접적인 효과가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확장을 지향하는데, 이 부분이 멀티미디어와 충돌한다. 상상력의 발현은 정보가 과잉될 때 오히려 차단되기 쉬운 까닭이다. 문장의 밀도 또한 난관으로 작용한다. 문학 작품의 문장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전후 맥락을 가늠하고, 함의(含意)와 비유를 유추하고, 기능과 미적 효과를 함께 고려해야 비로소 작가 의도가 파악된다. 천천히 곱씹고 음미한 뒤에 스스로 사유하여 상상으로 재현해야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요컨대 월등히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본격적인 문학이야말로 디지털 미디어로의 전환이 가장 늦게 이루어질 것이다.

  길 찾기, 혹은 길 만들기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시대는 바뀌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변화가 그러하듯, 출판시장의 현재 역시 불편하다. 흐름을 따르기엔 아쉽고, 거스르기엔 마땅치 않다. 그렇다고 멈출 수야 없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멈춘다고 세상도 함께 멈춰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넋을 놓으면 대처할 기회마저 잃어버릴 뿐이다.

  어찌할 것인가? 움직여야만 한다. 계속 꿈을 꾸고, 포기하지 않고, 옛 것과 새 것을 연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발걸음은 흔들리기만 하고, 아무리 노력한들 이루어지지 못할 공산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살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길을 찾거나,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 그러다 지쳐버리면…… 뭐, 어찌하겠는가. 일단 쉴 곳부터 찾아야지.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종교사상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이 오래된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직 책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계속 읽어야 한다. 종이에 인쇄되었든, 디지털 미디어로 구현되었든. 책상 앞에서든, 길 위에서든. 고요한 수목원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든, 와이파이 잘 터지는 카페 소파에서든. 그것이 ‘책’이라는 정체를 유지하는 한 읽어야 마땅하다. 표현이야 어찌 변하더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혹은 그렇게 믿기라도 해야 한다. 현상은 복잡하지만, 딱 한 가지만 생각하자.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책이 곧 길이고, 길이 곧 책이다.

1) 신종락, 『진화하는 출판문화』, 산과글, 2014, 247쪽.
2) 이동준, 『전자책 시대, 저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에밀, 2012, 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