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초인 지금도 강의 중  “신파적인 작품을 하나만 들어 보라”고 질문하면 어김없이 <이수일과 심순애>라는 대답이 나온다. 1913년 조일제의 번안소설과 신파극으로 발표된 지 무려 백 년이 된 이 작품『장한몽』은, 21세기의 대중들로서는 읽거나 관람한 적이 거의 없고, 심지어『장한몽』이라는 제목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백 년 동안 끊임없이 연극, 영화, 심지어 서도소리로까지 모습을 바꾸어 대중들에게 지속적으로 향유되었고, 인기가 다소 떨어진 1970년대 이후에도 학생들은 소풍 장기자랑 시간만 되면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나와  “순애야, 저 달을 보아라”,  “수일 씨, 모두 제 잘못이에요, 흑흑”,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도 좋단 말이야”하며 대동강변 부벽루 장면을 희화화하여 좌중을 웃겼다. 정말『장한몽』의 생명력은 고래심줄만큼 질기다.

 일본의『곤지키야샤(金色夜叉)』를 번안한『장한몽』의 생명력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돈 많은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는 이야기의 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담긴 ‘신파성’이라는 독특한 미적 질감이다.

 사실 돈이든 권력이든 간에, 세상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힘과 이득을 얻기 위해 사랑·천륜·인륜·진실 등을 저버리는 사람들은 인간 세상에 언제든 존재해 왔고,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나 예술작품에 늘 있어 왔다. 하지만 전근대시대에 이들의 존재는 그저 악한일 뿐이었다. 수용자가 공감할 만한 주인공이란 모름지기 춘향이처럼, 당장의 이익과 편안함을 거부하고 옥에 갇히면서도 일편단심 이몽룡만을 생각해야 마땅하다.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전실 자식을 살해하는 장화·홍련의 계모 같은 인물은 아무런 호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남자들을 매혹시켜 파멸로 이끌었던 권력지향적 팜므파탈들도 그저 요부(妖婦)로서의 매력만을 풍길 뿐이었다. 그러나『장한몽』은 다르다. 정혼자 수일을 버리고 중배와 결혼하는 순애는 악녀도 요부도 아닌 그저 평범하고 착한 보통 여자로, 수용자들은 순애의 결정에 충분히 공감하고 그 고통을 공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근대적인 작품이다. 분명 옳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특히 돈과 권력 같은 현실적 힘이 인간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더 이상 천륜이니 인륜이니 하는 하늘의 뜻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속화된 세상이 바로『장한몽』이 보여주는 현실인 것이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지성이면 감천’혹은 ‘사필귀정’의 믿음을 상실했다. 더 이상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거나 ‘암행어사 출두’로 억울함을 풀어주는 식으로 선한 하늘의 뜻이 착한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출해 주는 세상이 아닌 것이다. 착하게 살아도 (후세에라도) 복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폭압적 질서에 스스로 굴복하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1910년대는 식민지화를 통해 약육강식의 근대세계의 논리가 급격히 조선으로 밀려들어온 시기였다. 아직 많은 조선인들은 여전히 전근대적 세계관을 유지했겠지만,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는 대도시의 젊은 층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했을 것이며, 주인공이 냉혹한 세상에서 갈등하고 고통당하는 이야기를 담은『불여귀』,『장한몽』,『쌍옥루』 등 일본 가정소설의 번안물을 빠르게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 년 동안『장한몽』의 갈등 틀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재생산되었다.『장한몽』이 발표된 지 불과 4년 뒤에 나온 이광수『무정』의 주인공 형식은, 따지고 보면 기생이 된 은인의 딸 영채를 버리고 외국유학이 보장되어 있는 김선형의 남편 자리를 선택하는 ‘남자 심순애’이다. 현대에 들어온 후에도 이 이야기는 흔하디흔했다.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세 인물, 까치·엄지·마동탁에서 수일·순애·중배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지닌 은행 임원 자리가 고액연봉을 받는 프로야구 최고 스타로 바뀌었을 뿐이다. 몇 년 전에 인기를 모았던 만화와 동명의 리메이크 드라마 <쩐의 전쟁>에서는 빚에 몰린 주인공 금나라가 돈 때문에 애인을 잃은 후,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하는 이야기이니, 이수일과 매우 흡사하다. 바로 일 년 동안의 텔레비전드라마만 꼽아 보아도,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버리고 부잣집 후취자리를 선택한 여자와 그 주위를 맴도는 옛 남자의 이야기인 <착한 남자>와 <야왕>, 자신의 진실을 속이고 청담동 입성을 위해 유명의류업체 사장의 애인이 되는 <청담동 앨리스> 등 일일이 손에 꼽기가 힘들 정도이다. 좀 더 묵직한 역사를 담아낸 작품에서도『장한몽』은 수시로 그 모습을 보인다.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로 1990년대 대작 드라마의 선두로 꼽히는 <여명의 눈동자>에서, 주인공 여옥은 종군위안부 시절에 만난 학도병 최대치와 사랑을 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해방 후에는 그 옆에서 현실적 편안함을 보장해 주는 장하림과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여옥이 최대치를 버리게 되는 것이 분단이라는 역사적 상황 때문이라고 해도,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시청자의 마음을 졸이게 만드는 것은, 분명 첫사랑이지만 고통만 줄 것이 분명한 공산주의자 최대치와, 안전함과 편안함이 보장되어 있지만 첫사랑을 배신해야 선택할 수 있는 장하림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장한몽』식 삼각관계의 틀인 것이다. 돈이나 권력이 인간의 진심이나 사랑과 갈등하는 세상이 지속된다면 이 틀은 아주 오랫동안 유효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 그것이 지닌 ‘신파성’이라는 미적 질감은 몇 십 년의 수명을 다하고 이제는 거의 잔존물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파란 말은 일본의 신파극에서 유래하여 아직까지도 ‘신파적’, ‘신파조’란 말로 남아 작위적이고 과도하게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미감을 지칭할 때 주로 쓰이는 말이다. 지금 그것은 ‘올드패션’의 약간 촌스럽고 낡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만, 이 역시『장한몽』이 들어오던 때에는 아주 새롭게 신선하며 세련된 감수성이었다. 순애나 수일 같은 인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은 돈이 지배하는 폭압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옳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자신은 힘이 없으므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어영부영 끌려들어가 그 질서에 굴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들 주인공은,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끌려들어가고 굴복한 결과 생기는 고통들이 모두 ‘스스로 굴복’한 자신의 책임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편, 그 선택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피해의식을 함께 지닌다. 즉 ‘내가 죄인이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나는 정말 못났다’라는 자학과, ‘이렇게 고통스러운 내가 정말 불쌍하다’는 자기연민이 뒤범벅되어 독특한 미감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런 미감과 감수성은, 본격문학을 하는 최고 지식인들에게는 빨리 극복되었지만, 대중예술에서는 20세기 중반을 훌쩍 넘긴 시점까지 오랫동안 힘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질서가 무너지고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근대의 세상이 도래하긴 했는데, 그와 더불어 가져야 마땅한 근대적 개인의 주체성을 갖지 못했던 근대 초기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런 사고방식을 지닐 수밖에 없다. 어떤 선택이건 자신의 판단으로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의지적이고 합리적으로 추진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지는 근대적 태도에 아직 이르지 못하고, 타인이나 세상의 질서에 굴욕적으로 무릎 꿇으면서 그 고통과 치욕을 모두 자신이 못난 탓이라고 돌리고 흑흑 흐느끼고 한숨 쉬는 태도는, 식민지와 전쟁, 비민주적이고 온갖 연줄에 묶여 살았던 한국인들에게 꽤나 잘 맞아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시민혁명을 겪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1960년대부터 약화의 조짐을 보이더니, 1970년대 초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들이 청년기에 도달한 시점에서 급격히 힘을 잃었다. 이때부터 신파성은 ‘낡고 촌스럽고 후진 올드패션’의 대명사가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젊은 대중예술에서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보이듯 고통과 파멸 속에서도 끝까지 순수한 사랑을 지키거나, 김수현의 <청춘의 덫>에서 확인되듯 독하고 치밀하게 복수를 하는 확신범이 되거나, 사랑·윤리에 대한 집착을 떨어버리고 현실적인 이익을 기꺼이 따라가면서도 별로 죄책감을 갖지 않는 ‘쿨한’ 태도의 캐릭터가 유행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바보처럼 자학과 자기연민에 빠져 청승을 떨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대신 그 치욕을 바깥으로 내뿜어 복수를 하거나 죄책감 없이 악행을 합리화하는 데에 능한 태도가 더 익숙해진 세상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