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들보다 십년 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한국영화의 근대성 연구 서설」(1996)이라는 주제넘은 제목의 석사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는 ‘신파성’을 한국영화의 근대성의 일부로서 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분을 뺀 논문을 쓰면서 다른 지면에「신파적 멜로드라마의 근대성에 대해」(1995)라는 글을 실었다. 그 당시에 왜 그렇게 그 문제에 집착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국영화 미학의 고유한 정체성에 몰두했던 혈기가 가장 큰 원인이었던 같다. 그 원인의 배면에는, 민족주의적 입장이 있었는데, 그건 3.1 운동의 그것과는 달랐고, 공세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마 ‘1980년 광주’와 ‘반식민지민족해방론’의 입장에서 문화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다급한 분노와 실속 없는 자책감, 그리고 외국공부를 한 이들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 등이 배경 심리로 작동했던 같다. 또한 강영희의 석사논문「일제 강점기 신파양식에 대한 연구」(1989)가 자극을 주었던 것 같고, 이영미의「북한예술의 신파성과 그 변용양상에 대하여」(1996)를 인용한 것을 보면, 직·간접적으로 어떤 ‘문화의 자장’같은 것도 우리들(?) 사이에는 있었던 것 같다. 또 <미워도 다시 한 번>을 페미니즘과 서구 멜로드라마의 틀로써 쓴 어떤 글에 대한 반감 또한 있었던 모양이다. 소심하게 고백하자면, 그 이후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사실상 더 이상 논의를 진행할 능력이 없었고, 대부분의 글이 그렇듯 아무런 반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고백할 것이란, 내가 1910년대에 살지 않았기에, 1910년대 식으로 느낄 수 없기에, 변죽만 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역사 특히 문화사 연구자의 운명이긴 하지만, 과거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는 절벽 아래 떨어져 그 시대 사람들의 심성을 헤아리기란 얼마나 까마득한 일인가? 역사적 혹은 심성의 대화적 맥락에 닿을 수만 있다면 족하리라.

2.

 임화는「위대한 낭만정신」( 『문학의 논리』, 1940)에서  “이수일과 심순애보다 훌륭한 전형적 인물을 창조한 사람이 누구이냐고 불러볼 때‘내다’라고 직답할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고 말하며, 이광수의『무정』의 인물이나 이수일과 심순애가“되나 안 되나 당시 독자들의 일반적 이상의 일부를 남녀관계, 부녀관계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두루 알다시피 대표적 신파물『장한몽』(1913)은 일본의『금색야차(金色夜叉)』(1903)와『금색야차 종편』(1904)의 번안이다.( 『금색야차』의 엔딩은‘행복하지 않은 결말’이고『금색야차 종편』의 엔딩은 ‘행복한 결말’이다).『금색야차』의 여주인공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자아실현을 지향하는 복합적 인물인 반면『금색야차 종편』과『장한몽』의 여주인공은 방황은 하지만 사랑의 가치를 최종 목표로 삼았던 인물이다. 심순애가 김중배의 금력에 홀려 결혼하자 이수일은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하고, 이후 순애의 결혼 생활이 깨어지고 용서를 빌자 이수일이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물질에 대한 정신적 사랑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임화의 주장대로라면 심순애는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당시 독자들의 일반적 이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상’이다. ‘이상’이라 함은 실제 현실에는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대중들의 염원을 문학과 그 문학적 주인공이 대변한다는 맥락에서 임화 문학이 지닌 ‘현실반영론’의 하나인 동시에 그 유명하고도 악명 높은 ‘이식문학론’의 맥락에 닿아 있기도 하다. 사실 어느 시대이든 대부분 서사 작품의 주인공은 현실로부터 만들어진다. 하지만 인물의 도식적 분류나 이해로부터 한 발짝만 거리를 둔 채, 각 인물들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나 섬세한 차이 등을 고려한다면 ‘현실반영론’이란 다른 비평적 시각과 제대로 결부될 때만 대화의 길로 나설 수 있으리라 본다.

 <춘향전>과 <애마부인> 시리즈 다음으로, 무려 일곱 번이나 만들어진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1968)은 꺼져가던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 불을 지핀 작품 중의 하나였다. 이를 신파영화의 대표 격으로 보는데 반대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별-점증하는 고통-완전한 이별’이라는 구조를 가진 이 영화의 비극성은, 처녀가 유부남과 사랑을 하다가 본처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헤어져 몰래 아이를 낳은 것으로 출발한다. 여기에 처녀가 어떻게 결혼 여부를 모를 수 있냐는 질문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비극적 설정은 이러한 장르적 서사를 가진 예술작품 대부분이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색다른 것은 지나친 비현실성 혹은 우연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점증하는 비극적 사건의 나열로 이어지는데, 아이의 엄마는 친정인 속초에 있고 아이는 ‘개밥의 도토리’처럼 아빠 가족에 끼어 살고 있는 대목에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새로운 가족에 적응하기 힘든 아이는 엄마를 찾아 가출을 감행하지만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어린 마음에도 대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밖에서 울고만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속초에 사는 엄마가 어느새 그 동네 어귀 전봇대 뒤에서 울음을 참으며 아이를 지켜본다. 그러고는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독백으로 울부짖는다. 물론 이 장면에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관객들은 이 대목을 두고 속초에 있던 엄마가 어떻게 또 무슨 이유로 그 곳에 와 있는가에 대해 결코 질문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같이 울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객들의 몰입에 대해, 그 시대 여성들이 처한 상황과 삶을 간접적으로 반추한다는 현실반영론의 입장으로 설명한다면,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쉬운 점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사실「신파적 멜로드라마의 근대성에 대해」가 그런 결점을 가진 것이었다). 혹은‘선택적으로 또 저항적으로’자신만의 쾌락적 맥락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관객이론’(헨리 젠킨스,『텍스트의 밀렵꾼 Textual Poachers』)으로 설명하는 것도, 이 이론 자체가 지닌 결함으로 인하여 허전하기만 하다.

3.
 『장한몽』에서는 심순애가 돈을 위해 사랑을 버린 죄로 벌을 받은 후 이수일에게 용서를 빌어 행복한 결말을 이루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여주인공이 남자가 제공하는 선의조차 거절한 채 단호하게 떠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현실을 대하는 인물들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두 작품 모두가 ‘신파적’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백여 년 전부터 문신처럼 찍혀온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파의 핵심을 말하자면, 물론 이것은 학계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지만, ‘감정의 반복’, ‘극적 목적을 위한 사건의 작위성(우연성)’ 그리고 사건을 통하여 인물의 심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심리 그 자체의 극단적 표현’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거론할 수 있다. 시학(운문)의 형식주의, 즉 내러티브 구조와 전개 방식만을 두고 따져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산문 그 자체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나거나 혹은 여기저기 숨어 있는 어떤 문학적 요소들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시에서는 신파적 요소를 발견할 수 없는데도 유독 소설 등의 산문에서만 신파가 존재했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예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신파는 산문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이른바 ‘산문성’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에서는 시나리오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인 동시에 실제 환영의 형태로 스크린에 비춰지는 것이므로 결국 ‘스타일’의 형태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인물의 표정과 대사의 음색, 촬영과 편집된 상태, 화면 속의 구도와 각종 색채, 빛의 형태와 구도 그리고 화면 자체가 주는 리듬과 느낌 등이 바로 영화만이 가진 ‘산문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에 나타난, 그러나 당시 관객들은 결코 따지지 않았던, 비현실적 설정이나 우연적 작위성, 감정 과잉 그리고 강요하다시피 하는 인물 심리와의 동화 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설득력은 어디서 연유한 것이었을까? 1960년대 박정희의 개발 독재와 남성중심의 폭력적 가부장제 속에서 신음했던 당대 여성 관객들이 자신들의 삶과 직접적 관련은 없는 이 영화에 열광했던 것은, 그 비극성을 자신의 비극으로 전유하면서 공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고달픈 삶 속에 사는 여성 관객들은 이 영화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반응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역겨운 양식’ 탓에 끝까지 화면 앞에 앉아 있으리라는 보장조차 없다. 최근에도 여러 형식으로 대중 앞에 선 바 있는『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은 어떠한가? 과거의 신파양식을 볼 준비를 충분히 한 관객들이 단지 비극을 희극으로 소구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따라서 일본 가부키의 반대편에서 정치적 혁신극의 일종으로 출발한‘신파’가 점차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신파로 변하여 정착된 것처럼, 1913년『장한몽』의 신파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신파로 이어지다가, 현재에는 그 본질적 요소는 극도로 자제된 채 텔레비전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어릴 적 잃어버린 아들이 미국에서 의사로 성장하여 한국에 와서는 부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설정에 대한 반박을 들어보지 못했다)?

4.
 결국 문제는 신파성이란 용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근대 초기의 문물인 신파가 가진 여러 가지 측면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신파(성)란 근대의 다양한 결, 즉  ‘과학문명과 합리성’과‘근대 사회의 소비성과 소외가 있는 풍경’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반(反)근대적이거나 반(半)근대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 양식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동시대 서양 드라마 혹은 일제 하 조선문학이 지닌 서사적 품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조선 근대의 비루한 산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설명을 하면 할수록『장한몽』과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리고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불러일으킨 당대의 매혹에 대한 설명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지닌 ‘당대의 신파양식’은 다시 볼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도 신파는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계속 바꿔가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신파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파’와 ‘근대’를 떼어놓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한국영화의 특수한 근대성 속에 ‘신파성’을 추가하려는 시도로 현실반영론의 입장에서 신파물의 매혹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영화(내러티브)가 지닌 산문성에 주목하지 못한, (신)형식주의와 현실반영론의 어색한 절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술 안에『장한몽』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논의는 이제부터, 근대성 개념을 폐기처분하자는 것이 아니라, 근대라는 용어로부터 벗어나서 신파와 그 (영화적)산문성을 역사적 심성으로 재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파라는‘체계’를 벗어나 혼돈스런 형태의 신파와 그것을 주조한 그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