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쉬’의 첫 음반 <엔들리스 서플라이 오브 페인(Endless Supply Of Pain)>(1993)은 한국 헤비메탈의 기념비적인 음반이었다. 크래쉬의 이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헤비메탈은 ‘사운드’라는 요지부동의 벽 앞에서 항상 좌절하곤 했다. 1986년 ‘시나위’가 첫 음반 <헤비메탈(Heavy Metal)>을 발표하고 국내에서 헤비메탈이 시작된 이후 적지 않은 수의 훌륭한 밴드들이 등장했지만 이들 모두 국내의 낙후된 녹음기술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크래쉬는 일찍이 ‘김수철과 작은거인’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찾았다. 바로 유럽에서 최고의 프로듀서이자 엔지니어로 각광받던 콜린 리처드슨(Colin Richardson)을 프로듀서로 영입한 것이다. 그는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카카스(Carcass), 네이팜 데스(Napalm Death) 등의 음반을 제작한 헤비니스(heaviness) 계열의 특급 프로듀서였다. 데뷔음반 작업을 이런 거물 프로듀서와 함께하게 된 운 좋은 세 명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모두 쏟아 부어 국내 음악시장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헤비메탈 음반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명반이 그렇듯 이들의 첫 음반 역시 씬(scene)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십칠 년이 지났다. 긴 시간이 흐른 만큼 크래쉬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데뷔 음반의 명성을 잇는-음악적으로 가장 좋은 평가를 얻었던-2집 <투 비 오아 낫 투 비(To Be Or Not To Be)>를 발표했고, 4집 <터미널 드림 플로우(Terminal Dream Flow)>에 이르러서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시대의 조류와 호흡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시간은 대부분의 것들을 퇴색하게 만든다. 크래쉬는 1, 2집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앨범을 발표하지 못했고, 크래쉬라는 이름 역시 조금씩 박제화 되어가는 듯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여섯 번째 앨범 <더 파라곤 오브 애니멀스(The Paragon of Animals)>는 5집 <더 매시브 크래쉬(The Massive Crash)>가 2003년에 발표됐으니 무려 칠 년 만에 발표하는 새 음반이다. 이번 음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원년 멤버이자 <엔들리스 서플라이 오브 페인>에서 기타를 담당했던 윤두병의 복귀다. 그는 음악적 변화를 꾀하기보다 슬레이어(Slayer)와 세풀투라(Sepultura)와 같은 선배밴드들의 노선을 따르며 정통적인 스래쉬메탈(Thrash Metal)을 고수해온 기타리스트다. 반면 크래쉬는 과거의 스래쉬메탈만을 답습하는 밴드가 아니다. 그들은 당대의 음악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밴드다. 다양한 사운드적 시도를 한 <투 비 오아 낫 투 비>, 키보디스트를 영입해 스래쉬메탈과 일렉트로닉의 접목을 꾀했던 <터미널 드림 플로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밴드의 이러한 노선에 반기를 들고 팀을 떠났던 윤두병의 복귀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번 앨범은 크래쉬와 윤두병의 서로 다른 음악적 노선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인상적인 앨범이다. 윤두병이 가세하면서 예전 사운드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존의 스래쉬 사운드와 최근 헤비니스 씬의 주된 경향인 NWOAHM New Wave Of American Heavy Metal 의 절충에 가깝다. 크래쉬는 여전히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있다. 앨범의 첫 곡인 <크래쉬데이(Crashday)>에서부터 이런 절충적 변화가 엿보인다. 팀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이며, 보컬인 안흥찬은 전매특허인 야수 같은 스크림(scream) 보컬과 함께 멜로딕한 보컬라인도 능숙하게 소화해낸다. <콜드 블러디드(Cold Blooded)>에서는 그럴듯하게 ‘노래’를 하고 있기도 하다.

윤두병의 가세는 정통적인 스래쉬메탈 리프(riff)와 솔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두병과 하재용, 이 두 명의 기타리스트는 철저하게 계산된 리프를 들려주며 밴드의 과거와 현재를 무리 없이 이어준다. 둘이 일합을 겨루며 다양한 리프와 솔로를 번갈아 들려주는 <더 뉴 블랙(The New Black)>이 그 대표적인 곡이다. <루이네이션 이펙트(Ruination Effect)>나 <콜드 블러디드>에서 들려주는 인상적인 기타솔로 또한 새삼 윤두병의 가세를 실감하게 한다. 예전처럼 빠르고 맹렬하게 달리지는 않지만 대신 그루브를 택함으로써 사운드를 더 무겁게 들려준다. 밴드의 자체적인 힘으로 소화한 녹음 역시 칭찬해주고 싶다. 크래쉬는 이 앨범을 통해 자신들이 과거의 밴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앨범을 위해 칠 년을 별러온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다. 크래쉬와 윤두병 모두 씬으로의 복귀를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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