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레 미제라블>

루시드 폴이 4번째 음반 <레 미제라블>과 함께 돌아왔다. 그간 그의 신보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지난 2년은 유난히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전작 <국경의 밤>이 그의 다음 음반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고, 동시에 일종의 불안감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흡사 소포머 징크스(sophomore jinx) 첫 번째 음반을 성공하지만 두 번째 음반은 그 명성을 따르기 힘들다는 징크스에 대한 우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미선이’라는 밴드를 거쳐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음반만 3장, 그리고 영화음반 작업까지 했던 그에게 소포머 징크스 혐의를 두는 것은 지나친 과소평가이자 어폐가 될 테지만 그만큼 <국경의 밤> 음반이 루시드 폴의 음악경력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고백컨대 <레 미제라블> 음반 소식을 듣고서도 설레는 기대에 앞서 “과연 3집을 능가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에 우선 마음을 빼앗겼다.

사색적인 감수성을 서정적인 포크 멜로디에 실어 노래하는 루시드 폴 특유의 리리시즘(lyricism)서정주의은 사실 3집 <국경의 밤>에서 이미 완성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슬픔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국경의 밤> 음반은 노래라는 형식적인 틀이 무색해질 만큼 서정성이 크게 부각되었던 음반이다. 특히 표제작인 <국경의 밤>과 더불어 <노래할게>, <빛>, <날개> 등의 수록곡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낭송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아리아(aria)가 아니라 레치타티보(recitative) 보통의 화법, 내지는 연설이나 낭창을 모방하기도 하고 강조하도록 만들어진 노래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점을 찍은 것은 서정성뿐이 아니었다. 음반 후반 수록곡인 <키드kid>, <라오스에서 온 편지>, <사람이었네>에서 재발견한 루시드 폴의 사회적인 목소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분하게 잦아드는 선율은 놀랍게도 ‘자본이라는 이름의 세련된 착취’에 대해 직설화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즉 “난 사람이었네 어느 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 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라고 외투는 우리에게 하소연한다. 그것은 산업체제로 접어들면서 인간이 경제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이라는 이름하에 시장 메커니즘으로 포함된 결과 자본주의는 인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으로 보게 되었다는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역설에 다름 아니었다. 지금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슬픈 문제 중 하나인 세계화, 인종차별, 자본폭력 등에 대해 만약 ‘조용한 갈파(喝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루시드 폴의 노래가 바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시드 폴은 이번 <레 미제라블> 음반에서 전작을 ‘능가’하려거나 의외의 ‘변신’을 꾀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수록곡들 대부분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전작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처럼 들린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루시드 폴은 이번 음반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을 일치시키는 데 성공한 듯하다. 음반 제목인 레 미제라블이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발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장발장과는 달리 그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그의 설명은 음반 수록곡들이 공유하고 있는 주제의식을 잘 나타낸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루시드 폴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하고, 그의 새 음반을 듣는 사람은 변함없는 위로를 얻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이 낙천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노래가 소외 받는 이들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되살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피는지조차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작은 벼꽃, 너무 흔해서 귀한 대접 받지 못하는 고등어, 살기 위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사람은 모두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주인공으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는 것이 아닐까.

  전작들에서 꾸준히 느껴졌던 정서의 충돌, 즉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어른의 감수성과 유년의 기억에서 제자리 맴도는 소년의 감수성이 서로 조응하지 못한 채 하나의 음반에서 불협하게 공존한다는 느낌이 이번 음반에서 상당히 해소된 것처럼 들리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번 음반을 통해 학업과 음악의 병행이라는 그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전업 음악가의 길을 선택한 그의 개인사가 일종의 여유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랑스럽고 귀여운 분위기의 스윙 장르곡 <문수의 비밀> 등은 이전 작품들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의외의 정조가 아닐 수 없다. 음반 전체적으로 보면 <레 미제라블>은 루시드 폴 특유의 감수성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만족스러울 것 같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가 <국경의 밤>에서 보여주었던 서정성의 완성도가 너무 높았던 탓에 동일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번 음반은 전작의 변주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특히 음반 후반부 곡들, 즉 <고등어> 이후의 수록곡들은 예의 소년 감수성을 비슷하게 반복하고 있어 <문수의 비밀>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게 집중력이 떨어진다. 추상화와 패턴화의 길을 걷는 서정성은 그만큼 상투성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