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간판 드라마를 지칭하는 조어(造語)‘게츠쿠(月九)’*를 만들어낼 정도로 일본을 대표하는 드라마왕국 후지(フジ)TV가 개국 5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드라마 <우리집의 역사(わが家の歷史)>를 방영했다. <우리집의 역사>는 총 3부작으로 제작되어 사흘간 방영되었고 총 방영시간도 여섯 시간을 넘었다. 현대 일본의 역사를 한 가족의 삶에 입체적으로 녹여내면서 다채롭게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TBS가 지난 2000년 마츠시마 나나코(松島ななこ)를 주인공으로 기획, 제작한 <백년의 이야기(百年の物語)>와 유사한 형식이다. 근대 일본여성의 삶의 역사를 그린 이 작품도 3부작으로 제작되어 방영시간이 여섯 시간을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년의 이야기>가 마츠시마 나나코라는 톱스타를 캐스팅해 드라마의 주목도를 높인 것처럼 <우리집의 역사> 역시 화려한 배역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웬만한 드라마의 주연급들로 구성되어 있어 일본 드라마를 몇 번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익숙할법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종전 이후 쇼와(昭和) 시대 한 가족의 역사를 다루는 이 드라마가 정작 흥미로운 것은 과거를 읽어내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집의 역사>가 다루는 시대는 정확히 말하자면 쇼와 7년부터 쇼와 39년, 서기로 환산하면 1932년부터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지만 초점은 패전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시기다. 방송국이 자신들의 개국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드라마이므로 <우리집의 역사>에서 시간은 다분히 회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이 드라마는 우리를 과거라는 시간의 현장 속에 개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2010년 현재로부터 과거를 편안하게 조망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는 이 드라마를 보는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집의 역사>는 일본인들의 기억의 역사라고 말해도 좋을 법하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매우 정교하게 기억들을 편집시켜 놓고 있다. 야메가(八女家)를 중심으로 이들의 주변을 스쳐가며 잠깐씩 등장하는 인물 몇몇만 거론해 보자면 엔카의 명인 무라타 히데오(村田英雄, 1929~2002)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 일본의 국민만화라 할 수 있는 <사자에상(サザエさん)>을 그린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 1920~1992), 동물의 왕국을 꾸린 하타 마사노리(畑正憲),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 1924~1963),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배우 타카쿠라 켄(高倉健), <철완아톰(?腕アトム)>으로 유명한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蟲, 1928~1989), 영화감독 쿠로사와 아키라(?澤明, 1910~1998)와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1954)로 데뷔한 영화배우 나카다이 타츠야(仲代達矢),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와 나가이 카후(永井荷風, 1879~1959), 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미와 아키히로(美輪明宏), 코미디언 후루카와 롯파(古川ロッパ, 1903~1961) 등이다. 이들은 야메 집안을 배경으로 잠시 스쳐가듯 등장한다. 현재는 이미 죽고 사라졌거나 일가를 이룬 대중문화와 예술의 대가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채로운데, 일본인들에게 있어 이제 삶이란 이런 대중적 스타를 빼놓고 말하기 어려운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지만 드라마 속에서 이따금 TV가 생활 속으로 어떻게 들어오고 있는가를 알 수도 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위에 언급한 인물들은 TV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기도 하다.(<사자에상>과 <철완아톰>은 모두 후지TV를 통해 방영되었거나 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드라마의 장면들


그렇지만 드라마 전편을 흐르는 중심은 가족애다. 가족들이 서로 믿고 사랑하며 어려운 시절을 견뎌낸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표면적인 주제다. 종전 후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장녀 마사코시바사키 코우 분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아옹다옹하면서도 결혼을 하고 생업을 찾아 살아가는 이야기가 드라마의 중심서사를 구성한다. 궁핍한 삶 속에서도 가족들의 사랑이 눈물 나도록 정겨워 보이는 것은 어려웠던 시대를 그렇게 견뎌냈다는 어떤 공동체적 정서를 이 드라마가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져 보면 이것은 현대 일본인들의 엘레지(elegy)기도 하다. 이제는 잃어버려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며 정겨움이다. 그러므로 <우리집의 역사>는 오늘과는 단절된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드라마 <우리집의 역사> 포스터


그런데 그것은 마치 영화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Always 三丁目の夕日)>(2005)에서 다루어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종의 기억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이는 궁핍했지만 서로 믿고 사랑하고 연대했던 지난 시절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갖는 정치적 효과다. 아니, 오히려 <우리집의 역사>는 그것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는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암암리에 혹은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후쿠오카(福岡)의 나카스(中洲)에서 유흥업으로 성공한 오니즈카마사코의 남편, 사토 코이치 분가 도쿄(東京)로 진출해 일본 좌익활동에 종사하는 오오우라마사코의 첫 애인, 타마야마 테츠지 분와 논쟁을 벌이며 말하는 다음 대사는 그런 점에서 매우 노골적이다.


드라마의 장면들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나라는 지금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하고 있다는 것, 일본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 일본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적국이라고 여기던 미국을 추종하는 척하면서 이용하고 있다, 교활하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사하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역경을 딛고 일어선 것은 표피적으로 함께 고통을 나눈 가족이지만 그 밑에는 이런 내셔널리즘이 깔려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집의 역사>의 가족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가족은 넓게 본다면 일본 전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좌익에 속해 반미운동을 하는 오오우라의 “이대로라면 일본은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항변 또한 또 다른 내셔널리즘의 일면이다. 일본의 국가주의는 그런 식으로 작동되면서 군국주의로 나아갔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결과가 전쟁으로 인한 파멸이었음을 그들은 모르는 듯하다. 물론 그것이 일본의 대표적 상업방송인 후지TV의 이데올로기일 따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후지TV의 대중적 파급력을 감안한다면 간단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렇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가 주는 힘은 무시하기 어렵다. 이성적으로는 나름대로 비판적인 감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야메 집안의 막내 후사코에이쿠라 나나 분가 후루짱오오이즈미 요 분과 결혼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장면의 운동회에서 온 가족이 미노루마사코의 아들를 응원하고 함께 달리는 장면은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드라마를 안 만드는 것일까. 못 만드는 것은 아닐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