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007시리즈는 현란한 액션과 장쾌한 장면 이외에 별 볼일이 없다. 첩보영화가 한물간 셈이다. 그런데 중국만 예외인 것 같다. 2003년 <무언의 서약(誓言無聲)>이 중국 드라마부문 최고상인 페이텐상(飛天賞)을 받았다. 2004년 <매화당안(梅花檔案)>은 중국 전역을 일 년 내내 매화바람에 취하게 했다. 2006년까지 줄곧 기염을 토하던 첩보드라마 붐이 연말에 잠깐 주춤하는가 싶더니 2007년에 다시 일어나는 분위기다. <적색 추격령(紅色追擊令)>, <광주아지트(羊城暗哨)>, <특공조넘버5(五號特工局)>, <특수사명(特殊使命)>, <풍류인물(數風流人物)>은 모두 안방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드라마들이다. 

 사람들은 첩보드라마의 호황의 원인을 우선 경찰수사드라마의 황금시간대 퇴출에서 찾는다. 2004년 4월 18일 중국 광전총국(國家廣播電影電視總局)은 경찰수사드라마가 폭력성이 강하고 모방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는 구실로 황금시간대에 방영하는 것을 금지하고 심사도 더 강화하였다. 또 이때 사극의 인기는 한창 저조했고, 외국드라마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었으녀, 완성도 높은 드라마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첩보드라마의 시장 선점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할까. 가끔씩 불거지는 첩보전과 간첩사건들이 인터넷의 발달로 광범위하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2004년 공군지휘학교의 고위 장군이 타이완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2006년 5월에는 타이완 간첩들이 중국 꽝시(廣西)에서 잡혔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직 2001년 미국의 EP－3E 첩보기와 중국 전투기의 충돌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첩보드라마의 성행을 중노년 세대들의 향수의 결과로 보고 있다. 첩보드라마 대부분이 1950년대부터 1970년대 말에 유행하던 첩보영화나 소설들을 개편한 것들이다. <옛 도시의 간첩사건(古城諜影)>은 1950년대의 영화 <쉬츄잉사건(徐秋影案件)>을 개편한 것이고, <기밀국의 총소리(保密局的 槍聲)>도 같은 이름으로 1970년대 말에 상영된 바 있다. <꽃신 한 켤레(一雙 绣花鞋)>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있었던 필사본을 개편한 것인데, 1970년대 말 영화 <안개속의 도시(霧都茫茫)>로 상영된 적이 있다. <매화당안>도 문화대혁명 당시 지하에서 유행하던 필사본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1974년부터 1976년 사이 이와 같은 필사본이 무려 300여 편이 넘게 민간에 유통되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이념 이외의 모든 것들이 부정되던 시대에 필사본은 억눌린 인성의 발산, 낯선 외부세계에 대한 동경, 폐쇄사회에 대한 저항행위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는 전위적인 젊은이들의 상징적 행위였다. 

물론 우리는 첩보드라마를 경찰수사드라마의 대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념적인 것을 빼버리면 양자는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쫓아다니고 다른 하나는 쫓겨 다닌다는 점이다. 그러나 첩보드라마에는 경찰수사드라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사람들은 첩보드라마에서 현실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이에 만족감을 느낀다. 약삭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물질만능의 현대사회에서 재치와 융통성에 신물이 나고 혐오를 느끼던 사람들은 첩보드라마에서 역경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신념을 위하여 분투하는 초인간적인 영웅을 찾아내고 이에 감동한다. <돌격 병사(士兵突擊)>와 같은 군인드라마가 성공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돌격 병사>의 주인공 쉬산뚸(許三多)는 촌티나고 바보스러우며 융통성도 없지만 가치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인물로, 냉정하게 메말라 있던 전 국민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사람들은 잊혀진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황막한 사막에서 홀로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낙타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그 정신을 되찾고 싶었다. 바로 첩보드라마가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첩보드라마의 인기는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물질적인 추구만 강조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고, 초인간적 인성에 대한 갈구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