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서울의 달>’이라는 부제를 걸고, 김운경 작가의 <유나의 거리>가 5월 19일부터 JTBC를 통해 방영중이다. <서울의 달>은 1994년 1월 8일부터, 10월 16일까지 시청률 1위를 달리며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82부작의 MBC 주말드라마였다. 그런데 무려 20여 년이 흐른 2014년에 김운경 작가의 <유나의 거리>를 방영하면서, 20년 후의 <서울의 달>이란 부제를 걸었다.

희미한 옛 추억의 ‘서민 드라마’

2014년, 이제는 용어조차도 낯선 ‘서민 드라마’가 한때는 텔레비전 드라마 중 인기 장르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김운경 작가는 <서울 뚝배기>(1990년), <서울의 달>(1994년), <파랑새는 있다>(1997년) 등을 통해 바로 그 ‘서민 드라마’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지금도 그 ‘서민 드라마’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제는 거의 유일한 작가이다. ‘서민 드라마’1)는 ‘사회적 특권이나 경제적인 부를 많이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80년대 나연숙 작가의 <달동네>, 김운경 작가의 1990년의 <서울 뚝배기>, 1997년 <파랑새는 있다>, 노희경 작가의 1997년 <내가 사는 이유>, 2000년 <바보 같은 사랑>, 2004년 <꽃보다 아름다워>까지가 일련의 서민 드라마의 계보에 놓여 있는 드라마들이다.

이들 드라마들을 통해 ‘서민 드라마’의 특징을 추려보자면, 우선은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대체적으로 고도성장기의 우리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거기에 나연숙 작가의 <약속의 땅>(1982년)처럼 광산촌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서민 드라마’들은 도시, 그것도 서울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즉, 성공을 위해 혹은 조금은 살기 나으려니 하며 서울로, 서울로 밀려들어 서울의 변두리 ‘달동네’와 ‘빈민촌’을 형성하던 노동자, 도시 빈민 계급의 사람들이 주인공들이다. 당연히 변두리의 인간 군상이니 만큼, 그들이 고도 성장기의 대한민국에서 ‘성공’이라는 시대적 화두의 떡고물을 나눠 먹을 수는 없다. 평생을 살아도 ‘달동네(<달동네>)’요, 한평생 ‘성공’을 위해 질주해도, 식당 종업원(<서울 뚝배기>)이요, 잘 해봐야, 포장마차 주인(<파랑새는 있다>, <내가 사는 이유>)이다. 그나마 그 ‘서민’의 동네 안에서 사랑도 찾고, 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행복’을 운운할 수 있다(<서울 뚝배기>, <달동네>). 해피엔딩이면 감지덕지이다.

하지만 ‘파랑새’를 찾아 ‘서민’의 동네를 떠났던 주인공들은 ‘리얼리티’를 추구했던 드라마에서, 대부분 처절한 대가를 치른다. <서울의 달>에서 중학교를 중퇴한 학력으로 ‘제비’가 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성공’을 꿈꾸던 흥식(한석규 분)을 기다리는 건 처절한 배신이자 보복이다. <파랑새는 있다>에서 공중 부양이 목표이던 순진한 청년 병달(이상인 분)이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겨우 나이트클럽 차력사였고, 그가 꿈꾸었던 화려한 도시의 사랑은 된장녀의 농락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사는 이유>에서도 마음이 깊은 주인공 진구(손창민 분)는 철거민을 진압하는 폭력배를 벗어나기 힘들었고, 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체를 희생해야 했다. 배운 것 없고, 기댈 곳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돈’과 학력‘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 틈바구니 안에 끼어드는 건 쉽지 않은,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리얼리티’를 부여한 ‘서민드라마’들은 솔직하게 토로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실패하는 주인공들을 그려내며, ‘서민 드라마’들은 성장 담론 속에 고사되어 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사라져 가고 있다. 사람들은 ‘서민드라마’를 통해 자신들의 애환을 달래는 대신, 재벌과의 사랑을 꿈꾸는 판타지를 통해, 혹은 번듯한 중산층 가족의 허황한 가족애로, 현실의 상처를 덮도록 강요받는다.

누가 누굴 욕해 나를 탓해 가만 보면 똑같은 게

그냥 전부 웃기는 게 함정

어색한 충고는 내게 다신 하지 마

어떻게 보이든 나는 괜찮아

그냥 그렇게 가자 제발 날 좀 버려둬

세상 가는 길이다 내가 가는 길이야

- JTBC 월화 특별기획 <유나의 거리> OST Part.2 <함정>

-혜원(윈터플레이)

2014 <유나의 거리>, 다시 돌아온 서민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서울의 달>의 기시감을 강조한 것은 오랜만에 돌아온 작가 김운경의 대표작이었던 <서울의 달>을 통해 <유나의 거리>를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우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20여 년이 흘러도 여전한 <서울의 달>이라,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 사회의 숨겨진 현주소를, <유나의 거리> 홍보 문구는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다.

굳이 예고편에서 <서울의 달>의 홍식(한석규 분)과 <유나의 거리>의 유나(김옥빈 분)가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극중 배경인 유나가 사는, 쪽방처럼 방이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 주택이 등장하자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 예전 흥식이 살던, 아니 언제나 김운경 작가의 작품에 익숙하게 등장하곤 했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그 동네가 말이다.

사실 <유나의 거리>는 새롭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작가 전작들의 그 누군가가 느껴진다. 남자 주인공 김창만(이희준 분)에게서는 <서울의 달>의 춘섭(최민식 분)이 떠오르고, 창만과 유나의 관계는 <서울의 달>의 홍식과 영숙(채시라 분)의 관계가 역전된 듯하다. 아버지가 범죄자인 주인공 유나의 설정은 이미 작가가 <도둑의 딸>(2000)을 통해 써먹었다. 자기 복제 같은데, 그 자기 복제를 모처럼 보니 새삼스레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유나의 거리>의 첫 회를 보면서 2014년에도 우리가 잊고 있을 뿐 사실은 여전히 존재하는 그 세계가 새삼 깨달아지고, 그 세계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전해주는 김운경 작가가 반갑다. 20여 년이 지나도 서울의 밑바닥 삶은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김운경 작가 작품의 주인공들의 직업이 건전한(?) 경우가 드물다. <서울의 달>에서 흥식은 ‘제비’였고, <파랑새는 있다>의 병달이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나이트클럽 차력쇼였다. <유나의 거리>에서 감옥을 갓 나온 유나가 결국 또 할 수 있는 건, 대를 이은 ‘소매치기’요, 수많은 자격증을 가진, 하지만 정작 밀린 월급 때문에 갈 곳조차 마땅치 않은 창만에게 쉽게 찾아온 일자리는 콜라텍 기도이다.

처음 창만이 콜라텍에 취직하자, 그와 함께 일용직 일을 하던 칠복(김영웅 분)은 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면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얼마 뒤 막상 창만이 콜라텍 일을 그만두자, 날품팔이 일감을 얻지 못해 ‘그만 콱 죽어버리고 싶’었던 칠복은 오히려 정규직(?)이 어디냐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일용직보다는, 콜라텍 기도가 차라리 나은 세상, 그게 <유나의 거리>가 그려낸 2014년 서울의 현주소다.

유나의 소매치기 동료 남수(강신효 분)는 병들어 몸져누운 어머니의 병구완과 동생의 학비를 위해 소매치기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다고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불황은 소매치기 업계에도 예외가 없고, 남수와 그 동료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살기가 빠듯하다는 점에선 칠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매치기를 그만 둔 삶도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는다. 손을 씻고, 남편과 함께 노래방을 차린 양순(오나라 분)은 노래방에 온 손님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도우미를 자청한다. <유나의 거리>에는 핏빛 복수와 혈투도, 재벌가의 음모와 파멸도 없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노라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 누구도 쉽게 피해가거나, 벗어날 수 없는 밑바닥 삶의 질곡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나의 거리>에서 이들의 삶은 역사성을 지닌다.

그 흔하디흔한 조폭들이 이 드라마에도 역시 등장하지만, <유나의 거리> 속 조폭들은 삶으로서의 역사를 가진 조폭이다. 전설의 주먹 이화룡을 형님으로 모셨던 도끼(정준 분)는 큰 형님으로 모셔지지만 허울뿐, 그의 장황한 연설에 아랑곳 않고 젊은 조폭들은 고기를 뜯는다. 잠시 잠깐 동네 똘마니를 제압하며 큰 형님으로서 위용을 뽐내 보지만, 문간방 생활보호대상자인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똘마니였던 한만복(이문식 분)은 말끝마다 조폭으로의 자부심을 운운하지만, 그의 위세가 발생되는 곳은 그의 콜라텍과 집이다.

4회를 이르도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채 결국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마는 유나(김옥빈 분)의 아버지(임현식 분)는 딸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서도 지갑을 슬쩍하던 소매치기다. 그런 아버지를 불꽃놀이보다 더 감탄하며 첫 소매치기에 입문하게 된 딸. 그래서 부녀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옥을 들락거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소매치기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소매치기가 된 딸에게 죽기 전의 마지막 유언으로 스스로 잘라낸 자신의 손가락을 보여주며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병든 아버지를 보러 가기 위해 돈을 꾸어야 할 처지의 딸은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할 수 없다.

삶은 조폭이건, 소매치기이건 변함없이 흘러가고 그 속에서 그들은 쉽게 놓여나질 못한다. 생활은 그들을 밀어 붙이고, 그들은 직업으로 깜냥도 되지 못한 그것으로 인해 여전히 삶에 치인 모습으로 남는다. 성실하고 착한 청년 창만(이희준 분)은 단호하게 조폭 나부랭이의 삶을 거부하지만, 정작 그를 ‘함정’에 빠뜨리는 건, 소매치기 유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삶의 골짜기는 깊다.

20여년이 지나도 서울 하늘 아래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징하다. 그들은 쉽게 세상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들어가지 못하고 번번이 튕겨져 나온다.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하지만, 결코 비오스(의미 있는 삶)를 누릴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호모 사케르’2)들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튕겨져 나온 그들의 삶 역시 서울 하늘 아래 ‘존재’하는 삶이다. 그리고 김운경 작가는, 그 의미 없어 보이는 변두리 밑바닥 삶에 ‘인간적 의미’를 부여한다. 서울 하늘 아래 발붙이고 살기 위해, 눈앞의 이익을 위해 파렴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또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다고, <유나의 거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삶의 비정함만을 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끼 큰 형님이 행차하실 때마다 깔리는 <대부>의 OST처럼, 드라마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잡혀가면서도 이건 놀이고 게임이라며 아들을 달래던 전혀 아름답지 않던, 하지만 그 자체로 소중한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비극도, 운명도 그저 피해갈 수 없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며 덤덤하게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더,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마음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