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왕국’ 일본과 현대미술                                                 

 일본문화 속에서 만화가 차지하는 정도를 가늠하기란 어렵다.1 그러나 적어도 20세기 시각문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많은 현상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뿌리 깊게, 또 가장 폭넓게 일본의 시지각(示知覺)을 지배해 오고 있는 장르가 바로 망가(まんが)라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예컨대 일본에서는(1995년 기준) 1년에 한 사람당 평균 열다섯 권 가량의 만화책을 구입한다. 또 32페이지 정도의 미국 코믹 북(comic book)이 2달러가 넘게 팔리는 반면, 일본의 경우 경의적인 판매고를 말해주듯 400페이지짜리 주간 망가잡지가 고작 3~4달러 정도에 판매된다.2 망가는 일본 출판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중 히트작들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TV에 방영되고 이것은 또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거나 드라마, 실사영화로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모노크롬의 코믹 북에서 시작된 망가의 신화는 점점 크고, 총천연색의 스케일로 확장되면서 캐릭터, 스토리, 게임, 피규어(figure) 등 각종 문화마케팅의 가장 큰 콘텐츠가 된다.

그러나 일본 현대미술이 만화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서구에서 팝아트 붐을 통해 만화가 캔버스를 휩쓸고 지나간 지 30년이 지난 후에야 정작 만화왕국인 일본에서 니폰팝(にっぽん Pop)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우선 일본의 현대미술이 서구의 모더니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추상, 전위, 실험, 정신성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점, 또 탈(脫)모더니즘의 모색 속에서 이미지를 복원시키면서도 팝이미지를 차용하는 데에는 인색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곧 일본의 미술계가 문화의 수직적 위계(位階)를 깨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른바 일본 대중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만화를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시각언어의 대표로서 미술과 대립의 위치에 세우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소함의 세계화
1990년대 이후 국제 미술계는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세대교체에 들어가면서 신세대 아티스트들에 의해 제3의 물결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거대 자본주의와 거대 도시 사회의 도래 이후 나타난 젊은 미술가들의 특징을 마츄이 미도리(松井みどり)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우연한 미(美), 둘째 세계를 보는 미끈한 시각성의 회복, 셋째 미성년적(adolescent) 감정의 표현, 마지막으로 예술과 매스 미디어의 중간영역이 그것이다.3 특히 첫 번째 일상성은 스타, 예쁜 것에 대한 동경, 유년기의 기억 등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억압되어 왔던 것의 회복과 관련되고 이것은 이른바 하위문화로 일컬어지는 만화의 특징, 즉 유년기의 시각경험을 장악하고 있는 캐릭터들과 만화를 읽고 그려보는 사소한 일상 등이 1990년대 니폰팝을 형성하는 주요한 경험의 토대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나라 요시모토의 작품들


특히 ‘사소함’이라는 테마는 1990년대 이후 꾸준하게 등장하는 일본미술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개개인이 갖는 소소한 영역과 기억이 네트워킹을 통해 지구화되는 오늘날 정보화 사회의 통상적 모습과 유사한 경로를 갖는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한 팝아트의 재생은 이러한 정보화 사회의 심화와 관련된다. 개인화된 장(場)에서의 노골적이고 은밀한 하위 이미지가 ‘미술’이라는 언어로 승화되는 과정을 거쳐, 다시 개별화되는 원형의 반복이 제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다카시

예컨대 나라 요시토모(奈良美智), Mr., 쿠와하라 마사히코(桑原祐彦), 미야케 신타로(三宅信太?) 등 니폰팝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이고 표피적인 감정의 인덱스들은 개인적이고 협소하며, 익숙한 기억을 노출시킴으로써 사소한 것이 지닌 과장된 판타지와 가벼운 것에 대한 이질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들의 작품은 ‘기존 예술에 대한 거부’와 같은 미술에 대한 메타적 고민 자체를 상쇄시키고, ‘나의 경험이 곧 너의 경험이다’라는 사소한 기억의 회복을 요구한다. 특히 괴수, 인종을 알 수 없는 소녀, 외계 생명체와 같은 허구의 이미지를 통해 미분화된 유년의 욕망이 현실 속에서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만화가 된 미술의 패스티쉬
요컨대 이러한 니폰팝의 무기력증은 평론가 사와라기 노이(木野衣)가 꾸준히 주장하고 있는 패전 이후 일본문화의 하이브리드적 특징들, 즉 전승국으로서의 미국과 패전국으로서의 일본이 갖는 문화적 위계의 발생 그리고 이 위계를 충돌과 혼합의 형식으로 자기화하는 현대 일본문화의 태생적 한계에 대한 언급들에서도 나타난다. 즉 무라카미 다카시(村上 隆)가 슈퍼플랫(Superflat) 망가와 만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현대미술 개념에 대해 강한 희망과 강한 반발을 동시에 가지고 느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니폰팝은 일본만화가 가진 문화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을 통해 서구미술과 일본미술의 관계를 재고하고 있는 것이다.4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들

그러나 니폰팝의 정치학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 한계가 일본적 이미지로서의 만화를 창조하고 고착화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니폰팝의 작품들 역시 만화와 미술, 디자인과 미술의 벽을 허물고 작가 스스로 1차 이미지나 캐릭터를 직접 생산하는데, 이것이 대량생산된 2차 이미지를 차용한 1960년대 미국 팝아트와 니폰팝이 갖는 가장 큰 차이기도 하다. 미국 팝아트가 기존의 파퓰러(popular) 대상을 미술 속으로 끌어들여 왔다면, 니폰팝은 그 자체가 통속의 기호로 동화된다. 그리고 만화화(化)된 미술은 그대로 ‘일본적인 것’이 되는데 일본의 가장 보편적인 시각문화를 직접적으로 체화하고 표현한 것만큼 일본미술의 자연스러운 귀결 또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니폰팝이 국제 미술시장에서 일본 현대미술로서는 가장 선호되는 ‘Made in Japan’이 된 것은 필연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서구의 미술시장이 아시아 미술에 요구하는 ‘아시아적 색채’가 그 어떤 일본의 현대미술보다도 뚜렷하게 나타나며, 니폰팝 작가들 역시 이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니폰팝에 대한 국제적 요구 속에서, 우월한 요소로서의 일본만화에 대한 인식을 이들이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니폰팝은 결국 전시장이라는 ‘화이트 큐브’ 안에 안착한 망가가 되었고, 이 화이트 큐브 속으로 들어오는 작가와 관객 모두 과거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정신성이나 포스트모던이 제시했던 내용을 보기 위해서가 아닌, 친숙한 감정적 표피의 떨림, ‘내’ 기억을 회복하기 위한 디자인, 즉 미술관으로 들어간 거대한 일본만화의 재림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는 1990년대 이후 미술이 유혹하는 시각적 패스티쉬(pastiche)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의 독자가 만화를 찾았던 이유들, 예컨대 갑갑한 현실을 잠시 피해 떠나는 우주여행, 달콤한 연애, 배꼽 빠지는 웃음과 같은 현실도피의 기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술이 이러한 기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는가는 예술이 가진 권력에 대한 단호한 거부 혹은 시각문화의 위계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 등의 저돌적 제스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과거 20세기 미술의 엄청난 권위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미지의 범람 속에서 지금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에 대한 해답은 니폰팝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니폰팝 이후의 미술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서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