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熊本)시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雄彦)의 <마지막 만화전(井上雄彦 最後のマンガ展 重版 熊本版)>을 보러가며 ‘마지막’이란 수식어가 왜 붙었을지 생각해보았다. 29권이 미완으로 끝났으니, 만화의 마지막을 ‘만화책’이 아닌 ‘만화 전시회’로 하자는 것 아닐까 싶었다. 그의 만화 『배가본드』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의 생애를 그린 작품는 29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길고 긴 살육의 춤사위를 끝내고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1584~1645)가 칩거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 <마지막 만화전>은 그가 칩거를 시작한 레이간도(霊巌洞)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레이간도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마지막 만화전>이 도쿄(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배가본드』팬들로 대성황을 이룸)에 이어 왜 두번째로 구마모토에서 열리게 되었는지를 일러주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레이간도는 구마모토 시 중심부에 위치한 구마모토 성의 서쪽, 긴포산(金峰山)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곳에서 수묵화를 그리고, 『오륜서(五輪書)』미야모토 무사시가 기술한 병법전략서를 비롯한 저서를 쓰며 말년을 보냈다.

<마지막 만화전>이 구마모토에서 열린 연유는 하나 더 있다. 만화가 이노우에는 가고시마(鹿兒島) 태생이지만 구마모토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그가 다니던 구마모토 대학 바로 뒤에 미야모토 무사시의 말년을 돌보아 주던 호소가와(細川) 가문의 대저택과 미야모토 무사시의 공양탑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구마모토엔 ‘무사시즈카(武蔵塚) 공원’을 비롯해, 그가 직접 그림을 그린 수묵화가 전시되어있는 ‘시마다(島田) 미술관’ 등 미야모토 무사시와 관련된 유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토요일 오후, 예상은 했지만 1시간 정도를 기다려 전시장에 들어섰다. 동시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었고 사진촬영 금지는 물론, 껌을 씹을 수도 없었다. 전시장엔 단지 메모지와 연필만이 허용되었다. 만화 원화를 전시하면서 지나치게 요란을 떠는 거 아닌가 싶었다. 만화란 게 원래 좀 시끌벅적한 상태에서 자유롭게 들춰보는 장르 아닌가. 하지만 ‘만화 전시회’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엄숙함을 강요할만한 가치가 있는 ‘전시회’였다. 2차원의 만화가 전시라는 과정을 거쳐 어떻게 3차원의 입체공간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현재-과거(회상)-현재의 변화가 만화공간에선 칸과 칸 혹은 페이지와 페이지라는 2차원 공간에서 결정되지만, 전시공간에선 벽과 벽을 달리하며 그 ‘시간’들이 3차원 공간에서 입체화되고 있었다.

작업중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빛’ 또한 마찬가지다. 붓이 그려낸 그림자와 붓질이 비켜가 생겨난 빛 이외에도 어둠의 터널공간 혹은 조명기구를 통한 제3의 빛을 통해, 전시공간은 입체화되고 있었다. 살육과 번민을 그린 그림에 주어진 빛은 아주 희미해서, 그림 속의 굵고 진한 먹선은 더욱 어두운 이미지를 보여주었으며, 미야모토 무사시의 제자가 되고자 동굴로 찾아온 후키(風木)의 무서움에 젖은 파란 눈동자는 밝은 조명을 받아 더욱 파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관객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역시 <마지막 만화전>의 마지막 대목 아닐까 싶다. 마지막 코너에 이르자 만화책처럼 조그맣게 칸을 나눠 그림들을 전시하던 전시장은 갑자기 넓어지고, 전시장의 5분의 4정도가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한쪽에 남은 하얀 벽에만 조명을 받은 동일한 크기의 그림 여덟 장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세번째 그림까지가 아이를 안은 엄마의 모습. 네번째 그림은 그것을 바라보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고, 다섯번째 그림엔 아이 안은 엄마를 바라보는 무사시의 정면이 보였다. 그리고 여섯번째 그림이 주는 파격. 그림 속엔 검(劍)을 놓은 무사시의 손만이 위쪽에 그려져 있고, 목검(木劒)은 프레임 바깥 쪽 아래에 놓여있었다. 마지막 일곱, 여덟번째 그림에선 아이 대신 무사시가 엄마의 품에 안겨있었다.

여섯번째 그림이 다른 그림보다 조금 낮게 걸린 탓일까, 목검을 놓은 빈손은 미야모토 무사시가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정말 강한 것’이란, ‘검’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었음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무사시는 “최고로 강한 자가 되어보지 않고선, 부드러움 혹은 따뜻한 것”이란 그저 “시답잖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여덟 장의 그림이 무사시의 피 튀기는 살육의 그림들(엄청난 붓터치 내공이 느껴지는) 마지막에 배치된 탓인지 이노우에는 그저 ‘시답잖은 그림’ 이상의 떨림을 관객들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또다시 펼쳐진 넓은 전시장. 이번엔 무척 밝았다. 한쪽 벽엔 모두 여섯 장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정확하게 벽을 반으로 나누어, 왼쪽은 무사시가 바닷가를 걸어오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바닷가를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림들은 나뉘어 있었지만 넓은 바닷가 풍경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왼쪽 그림의 끝부분엔 “이제 됐지?”라는 독백이 실려 있고, 오른쪽 그림 중간엔 또다른 자신을 향해 “가자구…”라는 대사를 읊고 있었다. 다음은 백지의 작은 프레임. 마지막은 연한 먹선으로 그려 넣은 큰 프레임 속에 아주 작은 두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다.

전시포스터

전시된 그림 바로 밑은 실제 모래밭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걸어왔고 또 사라져간 바닷가 모래밭을 관객들이 함께 걸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노우에의 <마지막 만화전>에서 ‘마지막’의 방점이 찍혀야 할 곳은 이노우에도, 만화도 아닌, 미야모토 무사시 같았다. 모래밭을 걷는 이들이 내는 발소리는 그림 속의 인물과 그림 밖의 관객이 어떻게 동일화할 수 있는지, 소리를 통한 동일화의 새로운 공간창출이 어떻게 가능한 지를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만화’가 ‘전시’되면서, 만화 속의 시간과 빛과 소리가 새로운 입체공간으로 변전(變轉)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는 도중에 『배가본드』 30권이 나왔다. 찾아보았지만 <마지막 만화전>의 레이간도는 들어있지 않았다. 올가을에나 나올 예정인 31권쯤 해서 미야모토 무사시는 큐우슈우(九州)로 들어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구마모토 레이간도 행은 내년쯤에나 가능하다는 얘기인가. 방랑자(vagabond) 미야모토 무사시의 방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노우에의 <마지막 만화전> 역시 구마모토에 이어 내년 상반기에, 칸사이(関西)지방 오사카(大阪)와 도호쿠(東北)지방 오센다이(仙臺)에서 열릴 예정이다. 무사시와 함께 10년을 떠돈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劍) 대신 붓을 들고 일본천하를 주유‘방랑’하는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