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1992년 인천의 번화가는 누가 뭐래도 동인천역 부근이었다. 인천에서 가장 큰 개봉관과 가장 비싼 옷가게와 가장 붐비는 술집들이 몰려있던 인현동, 내동 그리고 신포동 일대. 거미줄 같은 지하상가가 엄청난 상권을 형성하며 대로 밑을 달리고 지상에 구(舊)시가의 쇠락한 흔적은 번쩍이는 네온사인으로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다. 주말이면 동인천역을 빠져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대한서림 앞에서 만나 삼삼오오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거나, 큰길을 건너 영화를 보러 가곤 했었다.

그해 여름 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짧은 머리에 헐렁한 교복, 발목까지 올라오는 큼직한 농구화와 무거운 배낭. 감정은 학급석차만큼이나 기복이 심했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상에도 서서히 넌더리가 나기 시작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당시 나는 학교 방송반이었다. 들어갈 때는 몰랐지만 약간의 불량스러움이 모임의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곳이었다. 과장된 불량기를 껍데기처럼 두른 선배들이 점심시간마다 방송부실에 모여, 가사는 둘째 치고 시끄러워서 귀가 얼얼하던 록(Rock)음악을 틀어대는 통에, 나는 시나브로 이른바 록키드가 되어갔다. 내가 동인천 한복판에 있던 심지음악감상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방송반 선배들을 통해서였다.  

 ‘심지’로 가는 길은 동인천을 점령한 거대한 인파의 흐름과는 약간 어긋나 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동인천역에서 내려 대한서림 반대편으로 곧장 지하상가를 빠져나온 뒤, 공무원시험 학원 앞을 지나 답동사거리 방향으로 십여 미터 올라가다, 왼편으로 비스듬히 난 골목길로 접어들어 왼쪽 두번째 건물……. 비좁고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 4층에 다다르면 매표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천오백 원을 밀어 넣으면 고무도장으로 ‘심지음악감상실’이라고 찍힌 메모지 한 장을 표 대신 주었다. 4층은 팝과 록, 5층은 헤비메탈. 받은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서 스크린 옆 DJ박스 문 앞의 바구니에 넣고 빈자리를 찾아 앉으면, 심드렁한 표정의 DJ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메모지를 확인하고, 신청곡을 틀어주었다. 군데군데 가죽이 벗겨져 솜이 튀어나온 소파, 뒤쪽 자리에 앉으면 감상실을 떠날 때까지 코를 괴롭히던 화장실 냄새, 구석에서 스멀스멀 스며드는 담배연기……. 학교 방송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시끄럽고, 더럽고, 게다가 무섭기까지 했지만, 일단 자리에 앉은 뒤 두어 시간 동안은 말 그대로 바짝 마른 솜처럼 음악을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열일곱, 이제 막 나만의 자[尺]를 들고 두리번거리던 내 눈과 귀를 사로잡은 사랑과 이별, 탐닉과 절망, 쾌락과 분노……. 그것은 ‘록’이라는 이름의 중독성 높은 예방주사였고, 주사제가 혈관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가는 동안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무대
2007년 어느 토요일 저녁, 황사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2층 창밖을 서성인다. 부평역 앞 모텔 밀집지역 안에 자리한 라이브 록클럽 ‘루비살롱.’인천 부평역 지하쇼핑센터 12번 출구에서 80미터 거리에  위치‘모텔촌의 오아시스’라는 별명답게 주변 건물들과는 자못 대조를 이룬다. 건물 밖에서 볼 때는 전성기를 넘긴 지 한참 지난 카페나, 김이 빠져버린 생맥주로 매상을 올리는 흔하디흔한 술집처럼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파와 간이의자를 벽쪽으로 몰아놓은 번듯한 공연장이다. 음료값을 겸한 입장료 5천 원을 내고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악기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조율을 하고 자리를 잡는다.

밤 8시, 양쪽 길이가 달라 더욱 어울리는 커튼을 앞에 두고 열 평 남짓 길쭉한 직사각형 공연장에 묘한 긴장감과 설렘이 가득 차더니, 이내 어쿠스틱기타 단 두 대로 조촐하게 꾸린 쁘띠사돌(Petitsadol)을 시작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사막돌고래’라는 팀에서 독립한 혼성 2인조 쁘띠사돌. 리드기타이자 보컬은 수줍은 대학생처럼 공연을 시작해 점점 긴장감을 높여가다 나중에는 우라사와 나오키(浦澤直樹)일본 만화가 의 <20세기 소년 20th Century Boys>에 등장하는 <켄지>로 끝을 냈다. 지난 번 공연이 한 달도 더 된 일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내공이 느껴졌지만, 뒷부분의 곡들은 기타 두 대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구성이어서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다. 뒤이어 무대를 점령한 것은 4인조 밴드 타바코주스(Tabacco Juice). 푸근하게 생긴 보컬은 샤우팅(shouting) 창법을 구사하더니만, 걸쭉한 목소리를 찰지게 뽑아냈고, 날카로운 인상의 기타는 온 무대에 땀을 흩뿌리며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웬만한 프로페셔널 못지않은 현란한 연주와 화려한 무대매너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루비살롱에서 곧 음반 레코딩을 한다고 하니 앞날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뒤 무대를 이어 받은 밴드는 연배로 보나 몸집으로 보나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5인조 그런지(grunge)시애틀에서 유래한 대안록음악의 일종 밴드 블루니어머더(Blue Near Mother). 루비살롱 홈페이지에 간략하게 오른 공연소개에는 그들의 이름 옆에 이렇게 씌어있었다. ‘What does age have to do with rock!(록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인천의 대표적인 인디밴드라는 타이틀과 그에 상응하는 15년 역사가 헛되지 않은 듯, 블루니어머더의 무대는 열정적이었다. 자리를 함께한 팬들은 물론, 후배 밴드들도 몸을 들썩거리면서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다 보니 자작곡을 포함한 다섯 곡이 훌쩍 지나갔다. 무아지경에 빠져 온몸으로 연주하던 기타주자는, 록키드였던 자신들이 직장인이 되거나 가장이 되거나 혹은 무직이거나 상관없이 음악을 하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고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는, 인상적인 말로 공연을 맺었다.

그리고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1999년 트라이포트(Triport) Airport, Seaport, Teleport 록페스티벌은 인천의, 아니 우리나라 록음악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행사를 진행하던 스탭들조차도 더 이상의 공연은 무리라고 판단할 정도로 공연 이틀 동안 비가 줄기차게 내렸고, 마침내 둘째날 행사는 대부분 취소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었던 전설적인 밴드 딥퍼플(Deep Purple)의 공연은 아직도 많은 록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트라이포트에서 관객과 뮤지션이 한목소리로 외친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는 지난해 별 두 개가 더 붙은 펜타포트(Penta-port)Airport, Seaport, Teleport, Business-port, Leisure-port 록페스티벌에서도 그대로 재현됐고, 심지음악감상실의 주말 단골이었던 나는 십수 년이 지나 방송 카메라와 함께 현장을 찾아, 그 시절의 내 모습을 공연장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몰아치는 장맛비 속에서도 두 번이나 전국의 록키드를 맞이한 인천. 이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록의 대표도시로 전혀 손색이 없는 인천의 힘은, 번화가 동인천 한가운데 자리잡은 허름한 음악감상실에 모여들던 수많은 록키드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좁은 방안의 스크린에서 넓고 자유로운 스테이지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음악감상실의 누렇게 바랜 스크린은 아직도 존재한다. 도시의 곳곳에서 작고 소박하지만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스테이지가 바로 그것이다. 한때 심지에서 음악에 취해 행복했던 누군가는 록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어 무대에 서고, 누군가는 대학교 시간강사가 되어 강단에 서고, 또 누군가는 이렇게 그 시절에 바치는 글을 쓴다. 그렇게 심지의 불은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