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문명 아래에서 밤은 낮의 연장이 되었다. 다름 아닌 전기의 발명 덕이었다. 휘황찬란한 전등 불 아래 밤은 주술과 마법의 시간으로부터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시간대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밤이 낮의 단순한 연장인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밤은 어차피 어둠의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어둠을 근본적으로 벗어난 것은 아니므로 밤은 낮과는 다른 것이다.

사실, 밤을 낮처럼 만드는 빛도 어둠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빛과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들 역시 낮의 사물들과는 다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사물들은 낮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반 쯤은 감추는 사물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들도 있다. 박상희의 열 번째 개인전 <야경 산책 - 인천, 홍콩, 요코하마展>는 밤의 어둠과 빛이 갖는 이런 의미를 시각적으로 잘 드러낸 전시이다.

간판 제작용 플라스틱 시트지를 활용해서 우리 주변의 간판과 상점의 모습을 독특한 질감으로 표현해 오던 그가 밤이라는 시간과, 도시라는 공간을 선택해서 작업한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탐색해온 여정의 한 단계가 완결된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적 일상 속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가게의 간판들, 그리고 그것이 빛을 가장 찬란하게 발하는 밤의 시간 속에서 박상희의 작품들도 묘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묘한 이유는 캔버스에 몇 겹의 색을 입히고 그 위에 검은 시트를 덮어 그것을 다시 칼로 깎아 사물들을 표현함으로써 얻은 질감을 통해 도시의 밤 풍경이 독특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물들을 표현하기 위해 시도해 온 그만의 표현기법이 도시의 밤을 만나면서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얻은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행복한 결합을 이번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도시의 밤 풍경들은, 건물들은 마치 네거티브 필름처럼 형태로만 존재하고 차의 불빛과 가로등, 그리고 상점의 간판들만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형국이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도시의 밤거리를 이렇게 인상적으로 표현한 작품들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칼로 오려낸 선들은 날카롭고 강렬해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의 날카로움이 시각적으로 깊은 인상을 주기에 족하다. 아울러 그 오려낸 자국이 보여주는 자취는 빛의 너울거림과도 잘 어울린다. 너울거림과 날카로움이 시트의 검은색 바탕과 조화되면서 밤이 보여주는 빛과 어두움의 세계를 잘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도시의 밤거리 정서와 분위기를 시적(詩的)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런 밤거리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것들은 상점의 불빛과 간판들이 뿜어내는 각양각색의 색채들이다. 자본주의적 삶이 지배하는 도시의 밤거리에서 ABC마트와 Buy The Way, PRADA가 빛을 발하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슴 설레게, 혹은 아련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박상희의 그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화려한 불빛 속에서 문득 찾아 올 것만 같은 사랑이 느껴지기도 하고 어딘가를 향해 부지런히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향한 애잔함이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박상희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밤을 충실하게 재현해낸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포착한 도시의 야경이 다름 아닌 요코하마와 홍콩, 인천이란 데에 있다. 인천이 고향인 그로서는 개항도시에 자연스레 관심이 뻗어갔을 법하고 이웃 나라 개항도시의 밤풍경을 그려낸 것도 그런 관심으로부터 나온 결과일 터이다. 그렇게 표현된 홍콩과 요코하마의 야경은 이국인(異國人)인 작가에게 포착된 그 도시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홍콩의 찬란한 야경은 이미 익히 알려진 바다. 영어와 한자들, 네온사인과 홍등이 빚어내는 그 어울림과 도심을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들과 상점가의 은은한 붉은 빛들은 홍콩이라는 도시를 매력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요코하마는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현대 도시답다. 그냥 다른 도시들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미나토 미라이(みなとみらい)의 한 오래된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만이 요코하마의 정취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천의 밤 모습은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풍경들에 비하면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오히려 홍대 앞의 야경을 표현해 낸 작품들이 도시의 밤 모습으로는 제격이다. 작가는 아마 인천의 야경에서 자신이 표현해 낼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던 까닭이 컸을 수도 있다. 신세계백화점 주변의 몇 컷만이 인천의 밤풍경으로 올라와 있다. 작가가 표현해 내고 싶은 어둠과 빛의 세계에서 인천은 아직 매력적이지 않은 탓인가, 아니면 너무나 익숙한 고향의 모습이기에 정작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박상희-홍콩택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