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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국열차>가 재현한 계급투쟁이 그렇게 거북한가?
통권 : 41 / 년월 : 2013년 9,10월 / 조회수 : 2810
영화 <설국열차>

이 뜨거운 한여름에 <설국열차>로 온 남한이 뜨겁다. 이 아이러니! 너무 더우니 피서를 넘어 아예 얼음나라를 꿈꾸는 것인가? 마치 지구온난화를 해결하려다 빙하기를 만들어버린 영화 속 그 인간들처럼. <설국열차>는 엄청난 속도로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몰이에 나서고 있다. 사실 첫 시사회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봉준호의 세계관은 발전했지만, 영화의 대중성이나 긴박감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지금은 그 평가가 무색해졌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아마 이 글이 실린 잡지가 출간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천만 관객을 돌파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서 <설국열차>가 <괴물>의 기록을 넘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호사가들은 입방아를 찧고 있다. ‘봉준호의 적은 봉준호’라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면서.
프로, 아마추어 평론가를 넘어 많은 이들이 <설국열차>에 대한 담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보와 보수, 신구, 세대를 넘어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설국열차>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영화의 완성도, 대중성을 넘어 상징, 의미, 해석 등의 단어들을 나열하며 열심히 <설국열차>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담론들을 보면서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영화가 계급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담론이 꽤 있다는 것이다. 뻔히 눈에 보이는 것을 아니라고 하는 발상이 왜 등장하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들은 아니라고 한다.
가령 이 영화를 두고 인류의 생존에 대한 영화, 인류의 발전에 대한 영화, 환경에 대한 영화라고 논하는 이들도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계급을 다루고 있지만 착취가 없기 때문에 계급투쟁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거나, 기차를 파괴하고 나가는 것이 오히려 낭만적인 좌파의 치졸한 발상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오히려 기차 안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것이 맞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좌파라고 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이런 담론을 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영화는 계급을 다룬 영화가 아니거나 계급투쟁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먼저 살펴볼 것은 이 영화가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이 말이 맞다면 <설국열차>에 그린 상황이 어떤 것에 대한 알레고리인지 물어야 한다. 정말 환경이나 인류 생존에 대한 알레고리인가? 그렇다면 왜 굳이 기차에서 계급을 나누어 그들이 앞 칸으로 진격해가는 것이 주요 내용이겠는가? 어떻게 보더라도 <설국열차>는 계급 문제를 정 중앙에서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 봉준호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쳐 영화 속에 담아왔다. 계급이 되어버린 강사와 교수의 문제, 연쇄 살인범을 통해 본 1980년 전체주의 사회, 미국과 남한의 관계에 바탕을 둔 정치 문제, 폐쇄된 지역 사회의 닫힌 모습 등을 그의 영화 속에 담아왔다. 이런 봉준호가 한국적 상황을 떠나 전 세계 프로젝트로 선택한 것이 <설국열차>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봉준호의 특기인 한국 사회의 문제가 영화 속에 녹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봉준호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포함한 인류 전체의 문제를 영화 속에 녹여내었다.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알레고리로, 매우 구체적이면서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가 계급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논자들은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논점을 흐리고 있다. 영화의 소재를 먼저 보자. 설국열차는 인간이 만든 빙하기에도 생존해 달리는 기차이다. 여기서 방점을 먼저 찍어야 할 것은 기차이다. 기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업혁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기차가 발명됨으로써 산업혁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기차의 발명으로 기계화, 과학화가 확산되면서 이농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이것이 도시화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것도 기차의 탄생이었다.
기차는 인류의 삶의 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정확하게 도착하는 기차 시간에 맞추어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 지금처럼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정해진 것도 기차의 발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차의 발명은 공간을 확장시켰다. 멀리 있는 곳의 자원을 개발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또한 그 자원을 가공해 멀리 있는 시장에 팔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차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토대인데, 바로 <설국열차>에서 그 기차를 소재로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설국열차는, 지금 우리가 이용하는 기차와 마찬가지로, 칸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차이가 있다면, 각각의 칸이 계급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앞 칸의 엔진이 있는 곳에는 ‘기차의 창조자’ 윌포드가 있고, 다음 칸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있고, 아래 칸으로 내려갈수록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으며, 가장 아래 칸에는 최하층민이 있다. 철저하게 계급으로 통제되는 사회가 설국열차 안의 사회이다.
설국열차의 엔진을 창조했고, 결국 이 열차를 운행하고 지배하는 통제자 윌포드는 누가 보더라도 포디즘의 창시자 포드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산업화의 핵심 인물인 포드. 포디즘의 시대가 가고 포스트 포디즘의 시대가 왔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기준은 포디즘을 개발한 포드의 자본주의이다. 결국 봉준호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 해석을 하자면, 봉준호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사회의 복사판이자 축소판으로 설국열차를 재현했다. 치열한 경쟁 사회이며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철저히 지배하는 사회가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사회인데, 바로 그 사회를 <설국열차>는 철저하리만큼 재현하고 있다. 
가지지 못하고 핍박받는 최하층의 사람들, 그들의 주식은 단백질 블록이라는, 바퀴벌레로 만든 것인데, 그것도 배불리 먹지 못한다. 복종만이 미덕으로 배워온 사람들. 겨우 생존할 뿐이지만, 열차 안의 총리는 밖에 있었으면 얼어 죽었는데, 열차 안에 있어서 살아남았다고 윌포드에게 감사하라고 한다. 마치 이것은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밥을 굶지 않고 적당한 혜택도 받고 살고 있다는, 그렇지 않고 후진국에 태어났으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라는 보수 우파의 목소리를 그대로 대변한다.

자신의 자식을 앞 칸에 빼앗기고 나서야 꼬리 칸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자식이 앞 칸으로 끌려가 생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아이들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신들도,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미래가 없을 때, 그들은 일어서지 않을 수 없다. 설국 17년에 발생한 이 반란은 다분히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영화로 보면 <전함 포템킨>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지도자가 반란군을 지휘해 나가는 방식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제는 유물이 되어버린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설국열차>는 자본주의 계급 사회의 차별을 없애고 노동자 농민 중심의 나라를 만들기 원했던 사회주의 혁명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설국열차>는 계급투쟁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봉준호는 계급이 점점 고착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알레고리로 설국열차를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앞 칸에 있는 이들이 꼬리 칸의 인간들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돈이 많기 때문에? 아니다. 어차피 기차에서는 빙하기 이전에 통용되던 화폐의 사용가치가 없다. 그 돈을 가지고 윌포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앞 칸과 꼬리 칸을 구분하는가? 단순하게도 총리의 말처럼, 차를 탈 때 이미 정해져 있다. 그 자체가 계급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데) 앞 칸의 부유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꼬리 칸의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노아의 방주가 된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의 인간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폭동도 지켜보면서 인간 개체수를 통제했던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신분이 지위가 되는 사회,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꼬리 칸의 사람이 필요한 사회가 <설국열차>에서 그린 계급 사회이다. 생활의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열차의 전지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는 계급이 존재하고, 그 계급은 통제사회의 통치자에 의해 유지된다. 그래서 대안은 엔진을 차지해서 기차를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부정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것만이 계급 사회를 끝내는 길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고, 밖으로 나가면 곰에게 곧 잡아먹혀 인류의 멸망을 볼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런 지적은 코미디에 가깝다. 차라리 이 장면에서 코카콜라 광고를 떠올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의미 있는 해석이다.
<설국열차>에 대한 해석은 영화를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낭만적 혁명주의의 폐해라고 할 수도 있고, 모험주의자의 도박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인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이 영화는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현실적 계급 모순을 특정한 상황과 공간 속에 밀어 넣어 인류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영화라는 것이며, 그 중심에 분명히 계급과 그 투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마저 부정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지닌, 의도적 오독이다.




#저자 약력
姜聲律
1970년 경북 안동 생. 영화평론가.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저서로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 바보』,
『한국영화, 중독과 해독』, 『영화는 역사다』, 『친일 영화의 해부학』, 『감독들 12』 등이 있다.
rosebud70@hanmail.net
글쓴이 : 강성률
작성일 :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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