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의 순간들

- 2015 SPAF와 거장, 그리고 신진

이주영

주목1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대한민국에서 단연 주목받는 공연예술축제이다. 해마다 전국 곳곳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연극축제들이 개최된다. 대표적인 축제로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거창국제연극제, 춘천국제연극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의 페스티벌은 국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그 규모 또한 제법 상당하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이하 SPAF)가 이러한 수많은 공연예술축제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고 호응도가 높은 공연예술페스티벌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단적인 예로 티켓 매진 속도를 들 수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티켓 창구 오픈과 동시에 정말 빠른 속도로, 매우 놀라운 속도로 대다수의 공연이 매진된다. 현장에 가면 자리가 있겠지, 란 기대를 가져볼 수 있겠으나, 현장에서 예매 취소 티켓을 구매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많은 관객들이, 또한 해마다 점점 늘어나는 관객들이 SPAF란 공연축제에, 이 축제가 야심차게 선보이는 연극과 무용 공연들에 관심을 갖고 호응하고 있다. 점점 SPAF의 책임감이 높아진다.

ⓒ2015SPAF Sang hoon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센터

SPAF를 구성하는 레퍼토리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국가의, 연출의, 단체의 작품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다는 것은 본 축제를 조직하는 주최 측의 입장에선 고마움이면서 부담이기도 할 것이다. 페스티벌에 대한 높은 기대감 때문인지 매해 SPAF에 대한 레퍼토리 선정과 이를 구성하는 당해년도의 테마, 그리고 유감스런 작품 수준 등의 연극계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어떤 해의 경우, 작품 라인업을 보는 순간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아닌 서울‘프랑스’공연예술제란 착각이 들 정도였으며, 어느 평론가는 예매 단계부터 빈곤함을 느꼈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SPAF에 대한 기대감을 놓지 못하는 것은 해마다 앞서의 비판을 한 번에 상쇄시킬 만한 작품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건질 만한 작품이 하나 정도는 있다는 것이다. 작년엔 미국의 유진 오닐 작품을 무대화한 러시아의 극단 RATM의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가 있었으며, 그 전 해에는 일본의 거장 연출인 스즈키 타다시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던 <리어왕>이 있었다.

올해 SPAF의 연극 공연들은 어떠한가. 라인업을 보는 순간, 기대감과 실망감이 매우 강하게, 그리고 동시에 일어난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베를린 앙상블과 거장 로버트 윌슨의 <셰익스피어 소네트>, 아방가르드 연극의 정수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갖게 한 예지 그로토프스키-토마스 리차드 워크센터의 <리빙룸> 등이 단박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반면 공연 편 수는 유감스럽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느 순간부터 SPAF의 무용 공연에 대한 호평들이 제출되더니, 연극보다 무용이 낫다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이에 대한 응답인지 올해는 이례적으로 무용 공연이 연극 공연보다 많았다. 물론 이 페스티벌이 ‘연극’ 예술제도 아닌 ‘공연’ 예술제인지라 굳이 연극이 무용보다 많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이 페스티벌을 보아온 연극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상황은 못내 아쉽다. 하지만 편 수의 차이, 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SPAF관계자에 의하면 무용보다 연극에 훨씬 많은 예산이 책정됐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연극에 많은 예산을 들이게 한 그 중심에는 <셰익스피어 소네트>이었다.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베를린 앙상블과 로버트 윌슨이기에.

주목2

로버트 윌슨이 한국에 첫 내한한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매번 우리를 설레게 하고 그러한 기대에 그는 성실하고 멋진 응답을 해주었다. 이번 SPAF 참가작인 <셰익스피어 소네트> 또한 그러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대에서 많이 보아왔지만, 일종의 정형시인 소네트를 무대화한 작품은 처음이다. 비극도 희극도 아닌, 시라니. 시를 무대화했다는 사실, 여기에는 로버트 윌슨의 작업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문학의 무한한 연극적 확장성에 대한 놀라움도 포함된다(물론 대학로 한 켠에서 백석의 시를 연극화한 이윤택 연출의 <백석우화>란 작품도 공연되었고, 그런 점에서 또 다른 거장인 이윤택 연출의 능력도 목도했지만).

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두 무대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1부의 경우는 비교적 밝은 이미지들, 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무대로 구성된 반면, 2부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앞서의 밝은 사랑 노래보다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이 상반된 무대 안에 로버트 윌슨은 하나로 흐르는 삶의 모습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면을 슬쩍 밀어 넣는다. 우리의 삶은 마냥 희극적이지도, 그렇다고 마냥 비극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따뜻하고 활기찬 밝은 이미지로 극이 전개되는 1부의 한가운데 사회부터 밀려나간 동성애를 연상케 하는 사랑이 등장한다. 소외되고 차별적 시선이 존재한 사랑이 이성애적 사랑을 가로지른다. 그것은 마치 사고처럼 보였다. 또한 이 사고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대는 박살난 자동차를 무대 한 가운데 세운다. 그리고 자동차 사이에는 나무가, 자연이 존재한다. 그런 시선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지속된다. 나무는 자동차를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항상 있던 그 자연스러운 풍경에 자동차가 돌진한 것이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흥미롭고 다채로운 무대가 세 시간 반 동안 아르코 대극장 무대에서 진행된다. 어느 정도 관극의 시간이 흐르다 보면 이 작품의 패턴이 읽히기 시작한다. 읽혀진다는 것은 관극이 느슨한 형태로 흐를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 비껴가기 위해 노래와 춤이 무대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고, 대체적으로 장면의 시작에 강렬한 음악 내지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시 해석의 난해함을 우려해서인지 친절하게도 작품은 노래로 푼 시를 반복해서 들려준다. 물론 이 작품이 이러한 여러 연극적 요소들로 무대를 가득 채웠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패턴이 주는 느슨함의 가능성이 말끔하게 제거됐다고 말하기에도 다소 머뭇거려지는 지점은 여전히 있다. 심지어 한국 관객들은 대사를 귀로 듣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눈(자막)으로 확인해야 하는 수고 또한 감수해야 했기에.

막이 내렸다. 박수 소리가 크다. 기립 박수를 치는 관객들도 상당수 보인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는, 베를린 앙상블은, 로버트 윌슨은, SPAF는 그렇게 우리의 기대에 부흥해주었다. 역시 주목할 만한 공연이었다. 이후 본 축제의 작품에 대한 회자되는 평은 예년과 다르게 무난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매우 불온한 사건이 SPAF에 기대를 일그러트렸다. SPAF의 기획 중 신진 연극인들에게 공연 기회를 주는, 그들의 미래를 장려하는 팝업씨어터란 섹션이 있다. 매우 긍정적이고 모범적인 기획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씨어터카페에서 공연한 김정 연출의 <이 아이>(조엘 폼프라 작)가 ‘수학여행’, ‘노스페이스’ 등 세월호에 대한 공연이라며 SPAF 주최 측에서 공연담당자에게 향후 공연 취소를 ‘명령’했다. 공연은 진행되었다. 하지만 SPAF 측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공연을 방해하였고, 이에 대한 진상이 이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의 후기로 증명되었다.

잘 나가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렇게 좋은 작품들을 통해, 팝업씨어터와 같은 좋은 취지의 기획을 내놓아 우수한 축제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치욕적인 일 하나로 SPAF는 그렇게 예전과 같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축제가 되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작품은 공연되고 끝이다. 그렇기에 비판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이번 팝업씨어터 사건은, 물론 이미 연극인들에게 큰 모욕을 주긴 하였으나, 진정한 사과와 사후 처리로 비판을 상쇄시킬 수 있다. 축제는 작품과 기획력으로 주목받아야 한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처럼, 팝업씨어터처럼.